멜버른, 동서고금·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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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 동서고금·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땅

(멜버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동양과 서양이 나란히 손잡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숨 쉰다. 호주 제2의 도시 멜버른이 그곳이다. 빅토리아 주의 주도이기도 한 멜버른에 가면 동서고금(東西古今)이 공존하고 상생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이어져 넉넉하고 편안한 조화를 이룬다.

세인트 폴 성당(사진/임형두 기자)

멜버른은 오스트레일리아 최남단의 도시다. 이를테면 호주 대륙의 ‘땅끝 마을’이라고 하겠다. 인구는 450만 명. 빅토리아 주 인구가 520만 명임을 감안하면 멜버른이 곧 빅토리아 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주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만 달러가 넘을 만큼 부유한 나라다. 국토 면적은 한반도 남한의 78배에 이르지만 전체 인구는 2천400만 명으로 절반도 안된다.

이런 호주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멜버른. 한때 수도이기도 했던 이곳은 최근 이 나라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2050년 무렵이면 시드니를 제치고 제1의 도시로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멜버른은 5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꼽혀오고 있다. 그 힘과 비결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멜버른이라는 도시의 특징을 손쉽게 알려면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으로 가봐야 한다. 도시 중심가에 있는 이 역은 명실상부한 멜버른의 1번지. 시내를 관통하며 흐르는 야라 강의 바로 옆에 위치한다. 건물 자체가 근대의 향기가 물씬 풍길 만큼 고풍스러운 곳이다. 멜버른의 중심도로인 플린더스 스트리트와 스완스톤 스트리트가 이 역전에서 만난다.

플린더스 역과 그 주변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상징적 장소다. 이곳 네거리 역전에서 바라보면 19세기에 지어진 세인트 폴 대성당과 근래에 건립된 호주 영상박물관(ACMI) 등이 들어선 페더레이션 광장이 길 건너 지척에 위치한다. 그리고 야라 강의 프린세스 다리 너머에는 빅토리아 국립미술관(NGV)과 아트센터가 거대한 철탑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이 가운데 플린더스 역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노란색의 이 건물 정문에는 시계 13개가 나란히 내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모두 13개의 방향으로 떠나는 다음 기차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들이다. 시침과 분침을 갖고 있는 이 낡은 시계들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방문객들과 만나왔다. 유서 깊은 도시인 멜버른의 상징 중 하나임은 당연하다.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사진/임형두 기자)

◇ 과거와 현재의 상생

멜버른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그 역사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수만 년 동안 원주민 쿠린족이 살아오던 이곳에 영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때는 1830년대 중반. 이전에 네덜란드인들이 잠시 들러 가긴 했으나 쓸모없는 땅이라고 여겨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극소수의 영국인이 살던 멜버른이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 데는 ‘골드러시’가 있었다. 그 근원지가 멜버른 북서쪽에 있는 발라랏. 이곳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시작됐고 영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등 세계 각지에서 황금을 찾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는 미국 서부에서 전개된 골드러시 시대와 겹치기도 한다.

멜버른이 호주를 대표하는 도시로 급부상한 것은 바로 이때. 유럽과 미주, 아시아 등 곳곳에서 황금을 찾아 달려들었고, 멜버른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면서 호주의 중심지가 돼 갔다. 연방 수도가 지금의 캔버라로 옮겨지기 전까지 1901년부터 27년 동안 호주 최대 도시이자 행정 수도로 발판을 굳혔던 것이다. 동서의 문화가 한데 뒤섞여 어울리며 융합하는 시대였다.

과거와 현재가 친구처럼 어울리는 모습은 도시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중심가를 당당하게 내달리는 트램들이다. 19세말과 20세기 초에 거리를 오갔던 구식 목재 노면전차인 트램이 최신 전동 트램과 함께 시민들을 차분차분 실어 나른다. 경적 소리 역시 무척 고풍스럽다. 날카로운 기적 소리가 아니라 딸랑거리는 울림이 정겨운 종소리여서다. 이들 트램은 승용차, 마차 등과 더불어 거리를 공유하며 활보하듯 내달린다.

아기자기한 골목 문화를 통해서도 낡음과 새로움이 차별의식 없이 병존함을 느낄 수 있다. 한국 영화 ‘런닝맨’의 촬영으로 잘 알려진 디그레이브 스트리트의 로열 아케이드가 그중 하나. 1869년에 건립돼 멜버른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인 이 아케이드에서는 최신 패션의 상품을 구입하고 커피 문화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줄을 잇는다. 한국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촬영지였던 호시어 레인 골목도 친숙하게 다가오긴 마찬가지다. 그만그만한 전통 건물과 현대 건물이 전혀 어색함 없이 서 있다. 워낙 관리가 잘 돼 있어서인지 이들 옛 건물에서 낡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사각의 계획도시인 이 도심에 있는 골목은 180개나 될 만큼 그 오묘한 아름다움이 곳곳에숨 쉬고 있다. 바로 인근에 있는 블록 아케이드에서도 19세기 건축물의 멋을 만끽할 수 있다.

야라 밸리 지역 포도밭과 와이너리(사진/임형두 기자)

◇ 미식과 와인의 고장

멜버른은 세계 곳곳의 음식 문화가 공존하는 식도락의 고장이기도 하다. 골드러시 후 서양과 동양에서 찾아온 이주민들이 독특한 문화를 이식하며 다양성의 도시로 만들어갔던 영향이 크다. 각국의 음식문화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 즐비해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운다. 뚜렷한 호주 음식이 없는 가운데 다민족·다국적 음식과 음료들이 모두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페루 등 서양 음식은 물론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음식도 쉽게 만난다. 퓨전 음식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멜버른이 맛의 도시로 자리 잡는 배경에도 앞서 얘기한 골드러시가 있었다. 금이 넘쳐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여기에 다양한 민족들이 밀려들면서 음식 고급화가 이뤄졌다. 돈이 넘쳐나니 음식 문화가 발전했고 이는 예술, 패션,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차이나타운의 경우 600m가량의 거리에 조성돼 있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 규모를 자랑한다. 교민들에 따르면 근래 들어 한국 음식도 페루 등 다른 나라 음식과 함께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멜버른에만 한국 음식점 20여 곳이 운영되고 있다.

이번에는 호주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인 와인을 살펴보자. 호주는 프랑스와 더불어 최대의 와인 생산국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공해 없이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라는 포도로 만든 와인은 갖가지 맛으로 애호가들을 사로잡는다. 모스카토, 시라즈, 피노 누아르 등 다양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맘껏 음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가 야라 밸리 지역이다. 멜버른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가량 가면 광활한 벌판에 드넓은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 일대에는 200여 곳의 포도밭과 60여 곳의 와이너리가 있어 애주가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 도메인 샹동, 예링 스테이션, 드 보톨리 등 널리 알려진 대형 와이너리를 비롯해 가족 단위로 운영되는 소형 와이너리들도 각기 개성을 자랑하며 와인 애호가들을 맞는다. 물론 야라 밸리와 함께 빅토리아 주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닝턴 페닌슐라의 와인 생산지도 들러볼 만하다.

포도밭의 울타리를 따라 하얗고 붉은 장미꽃들이 길게 뻗어 있는 게 인상적이다. 이들 장미꽃은 단순한 미관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심어졌다는 것이다. 장미꽃이 병충해에 특히 약해 이들 꽃이 시들면 농부는 즉각 방제에 나선다고 한다.

미식의 도시인 멜버른에서 열리는 대표적 먹거리 축제는 매년 3월에 열리는 ‘멜버른 음식와인축제’다. 1993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데, 멜버른을 중심으로 빅토리아 주 곳곳에서 250여 개의 크고 작은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때는 세계 30여 개국의 식문화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다. 축제 때는 보통 25만 명 안팎의 식도락가들이 찾아온다.

벨그레이트의 퍼핑빌리 증기기관차(사진/빅토리아 주 관광청 제공)

◇ 자연과 인간의 공존

호주의 다른 지역들이 대부분 그렇듯 멜버른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땅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도심 곳곳에는 ‘정원의 도시’라는 별칭에 걸맞게 많은 공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시민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도심의 녹지율은 무척 높은 편이다. 도심 공기가 맑고 병충해가 별로 없어 어린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잔디밭을 뒹굴거나 거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도심에서 조금만 나가면 소와 양,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농장들을 만난다. 공장식 사육장에 갇혀 햇빛 한 줄기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가축들과는 전혀 딴판이다. 대자연과 함께하는 가축 방목 환경이 부럽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어 인간은 물론 이들 동물에도 천국이나 다름없겠다 싶다.

대자연의 웅장함과 경이로움을 더욱 감동적으로 맛보려면 그레이트 오션 로드로 가야 한다. 멜버른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노라면 해안을 따라 광대하게 펼쳐지는 자연의 하모니를 만끽할 수 있다. 바다와 절벽, 초원과 산을 동시에 감상하며 달리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길이는 무려 243㎞. 가는 데만 네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구불구불 해안을 따라 조성된 왕복 2차선 길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군인들이 건설했다고 한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클라이맥스는 그 끝에 있는 12사도 바위다. 바닷가 절벽을 따라 줄줄이 서 있는 이들 바위는 이곳이 호주의 3대 경이로움으로 꼽히는 게 당연하다 싶을 만큼 장엄하고 신비하다. 물론 12사도는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의 열두 제자를 말한다. 안타깝게도 이중 네 개가 최근에 무너져 현재는 8개만 남아 있다. 게다가 나머지도 언제 무너질지 몰라 일부에서는 ‘12사도’라는 명칭을 바꾸자는 얘기도 나온다고 한다. 해안을 거닐며 바라보는 경치도 좋지만 관광용 헬기를 15분 정도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광 또한 그만이다.

자연의 장대함을 시간 속에서 느껴보려면 단데농의 벨그레이브에서 퍼핑빌리 증기기관차를 타 보면 좋다. 동화에서나 봤음직한 증기기관차가 하얀 증기를 길게 내뿜으며 “칙칙폭폭, 칙칙폭폭”, “삐~익, 삐~익” 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며 달린다. 세상에 나온 지 무려 100년이 넘은 증기기관차가 ‘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칼립투스 나무 우거진 원시림 속으로 씩씩하게 내달린다. 기관사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 역시 대부분이 70대 안팎의 노인들. 기차를 타며 긴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기에는 이래저래 잘 어울린다.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의 야외전시장(사진/임형두 기자)

◇ 문화와 스포츠, 패션의 도시

멜버른 사람들은 자연과 역사 속에 풍부한 문화·예술과 다양한 스포츠를 즐겨왔다. 1인당 예술가의 비율이 미국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보다 높다. 세계적인 연주회나 전시회가 끊이지 않고 열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와 함께 세계적인 스포츠의 도시이기도 해 다수의 큼직한 국제경기가 연례적으로 열린다. 호주 최대의 도시인 시드니에서 올림픽이 2000년에 열린 반면, 멜버른 올림픽은 1956년에 개최돼 그 저력을 짐작게 한다.

먼저 플린더스 역에서 야라 강 북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빅토리아국립미술관(NGV)과 아트센터로 가보자. 1968년에 건립된 NGV는 현대미술품만 2만5천여 점을 보유한 NGV오스트레일리아와 피카소, 모네 등 유명 작가 작품을 전시한 NGV인터내셔널로 나뉜다. 유럽 작가는 물론 아시아 작가와 호주 원주민 작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야라 강변에 있는 빅토리아 아트센터는 높이 115m의 뾰족한 철탑이 인상적이다. 이 철탑 구조물은 발레리나를 형상화한 것이다. 밤이면 신비한 조명으로 주변 야경을 풍요롭게 한다. 서울의 예술의전당과 흡사한 이곳 공연장에서는 멜버른 극단, 호주 오페라단, 멜버른 심포니 등 이 도시의 대표 공연단이 무대를 꾸민다. 세계적 명성의 호주 발레단과 호주 발레학교 역시 이곳 멜버른에 자리 잡고 있어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스포츠 경기도 연중 다채롭게 구경할 수 있다. 세계 4대 테니스 경기 중 하나인 호주오픈테니스대회를 비롯해 자동차 경주대회인 호주 포뮬러 원 그랑프리, 호주인의 사랑을 받는 멜버른컵 경마대회 등이 이 도시의 경기장에서 이어진다. 호주인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크리켓 경기와 푸티(footy) 경기는 여름과 겨울에 각각 열린다.

야라 강의 야경(사진/임형두 기자)

◇ 야라 강의 야경과 환상미

구불구불 이어지는 야라 강과 주변에 높다랗게 치솟은 현대 건축물의 야경을 감상하는 명소 중 하나가 프린세스 다리와 그 바로 앞의 페더레이션 광장이다. 주변의 건물과 다리, 역사에서 비치는 불빛은 낮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여름철에는 곳곳의 루프톱바에서 음식과 칵테일을 즐기며 사방을 둘러보는 맛이 쏠쏠하다.

야경을 묵묵히 감상하노라면 강의 이름이 영어 명칭이 아닌 원주민 언어임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온다. ‘야라’는 ‘길다’는 의미의 원주민 언어. 뜻으로만 보면 중국의 ‘창장’(長江)이나 한국의 ‘한강’과 같다고나 할까. 영국인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대부분의 지명을 영국식으로 바꿨음에도 야라 강을 비롯한 몇몇 지명은 용케 살아남았다. 참고로, 빅토리아 주의 명칭은 19세기 최장수 여왕으로 꼽혔던 빅토리아 여왕에서 비롯한 것이고, 멜버른이란 도시명은 당시 내각의 수장을 지낸 멜버른 총리에서 연유한다.

서양인들의 해양개척시대는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있기도 하다. 상생과 공존의 길을 택한 뉴질랜드 등 극히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서구 식민개척민들이 원주민을 대거 살상하거나 추방하고 소외시키는 지배의 길로 내달렸다. 백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호주 역시 자신의 역사를 영국인 상륙부터로 보고 있다. 원주민은 그만큼 소외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주민의 깃발이 주 의회 의사당 옥상에 호주 깃발과 함께 나란히 내걸리고 최근 들어 원주민이 정부 각료로 입각하는 등 발전적인 흐름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오페라하우스로 유명한 시드니가 항만 문화의 대표적 명소라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야라 강의 멜버른은 강변 문화의 상징적 도시다. 야라 강의 눈부신 야경은 그 아름다움과 함께 공존과 상생의 미덕도 소리 없이 역설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