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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을 키운 사람, 사람을 키운 인생 황병구

    kun kwon Park2026년 8월 21일8월 21일
    꽃을 키운 사람, 사람을 키운 인생 황병구

    사진: 꽃을 키운 사람, 사람을 키운 인생 황병구 관련 이미지

    꽃을 키운 사람, 사람을 키운 인생 가난한 농군의 아들에서 미주 한인 경제계 리더까지 — 황병구의 70년 프롤로그 — 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 플로리다의 뜨거운 햇살 아래 거대한 온실이 펼쳐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수천, 수만 송이의 호접난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 줄기에 일곱 송이만…

    꽃을 키운 사람, 사람을 키운 인생

    가난한 농군의 아들에서 미주 한인 경제계 리더까지 — 황병구의 70년

    프롤로그 — 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

    플로리다의 뜨거운 햇살 아래 거대한 온실이 펼쳐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수천, 수만 송이의 호접난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 줄기에 일곱 송이만 피어도 상품으로 인정받는다는 호접난.

    그러나 이곳의 난은 열다섯 송이, 스무 송이의 꽃을 피워낸다.

    이 농장을 일군 사람은 황병구.

    미국 전역에 호접난과 관엽식물을 공급하는 코러스 오키드의 창업자이자, 미주 한인 경제인 사회를 이끌어 온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화려한 온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시간을 70여 년 전으로 돌리면, 이야기는 경북 청송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시작된다.

    그곳에는 꽃은커녕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한 소년이 있었다.


    1장. 아버지 없는 세 살배기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1년.

    경북 청송 부동면, 지금의 주왕산면 새골에서 황병구는 태어났다.

    4형제 가운데 셋째였다.

    그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막내동생은 아버지 얼굴조차 보지 못한 유복자였다.

    네 아들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김두이 여사는 보따리를 들고 장터를 돌았다.

    소년 황병구에게 가난은 설명이 필요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의 생활이었다.

    황병구

    “조밥이나 옥수수를 먹었어요. 그것도 없으면 굶었죠. 검정고무신이 닳아서 구멍이 나면 새끼줄로 묶어서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이 잘못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반복해서 들려준 말이 있었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듣지 마라. 어디를 가든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훗날 수백만 달러를 움직이는 사업가가 된 뒤에도 황병구가 첫째도 정직, 둘째도 정직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때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2장. 학교 대신 논밭으로

    가난은 그에게 공부할 시간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1학년조차 마치지 못했다.

    먹고사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학교 대신 농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4H클럽을 만났다.

    농촌지도소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농법을 배웠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시도했다.

    노지에 비닐재배 방식을 도입하고, 박정희 정부 시절 증산 정책의 상징이었던 통일벼를 청송에서 시범 재배해 볍씨를 농민들에게 보급했다.

    고추도 심고, 담배도 심고, 딸기도 키웠다.

    4H운동과 새마을운동의 젊은 지도자로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농사는 잘됐는데 돈이 없었다.

    농약값을 내고 비료값을 내고 인건비를 주고 영농자금을 갚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열심히만 한다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는 인생의 첫 번째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고향을 떠나는 것이었다.



    3장. 아무도 모르는 도시, 울산

    1981년.

    황병구는 연고 하나 없는 울산 장현동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계산이 있었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으로 변하고 있던 울산에는 조선소와 정유·화학공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이 몰리면 먹거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도시 근교농업에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판단은 맞았다.

    그러나 한 가지를 계산하지 못했다.

    텃세였다.

    외지인에게 좋은 농사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농촌지도소에서도 도움받기 쉽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인사였다.

    마을 어른을 만나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매일 했다.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왕성도라는 마을 주민이 찾아왔다.

    왕성도

    “황군아, 나는 네가 너무 좋다. 나는 형제가 없는데 네가 내 동생 해라.”

    황병구는 그날부터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왕성도 씨는 집 한 칸을 월세 없이 내주었다.

    딸기 농사를 지을 돈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소를 팔아 마련한 230만 원까지 건넸다.

    또 다른 주민 황재현 씨도 그를 도왔다.

    농협에서 담보가 없어 500만 원 대출을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신의 돈을 빌려주었다.

    황병구는 그 돈으로 딸기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1,170만 원을 벌었다.

    500만 원을 갚고도 600만 원 이상이 남았다.

    평생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 돈이 남았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청송에서 아무것도 없이 울산으로 온 청년에게 처음 자본을 만들어 준 것은 은행이 아니었다.

    신뢰였다.


    4장. “가난한 농부에게 더 필요한 돈 아닙니까?”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농민후계자로 선정되면 저리의 영농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첫 도전은 탈락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도 없고 땅도 없고 담보도 없었다.

    황병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찾아갔다.

    4H 활동 상장, 우수새마을지도자 표창장, 각종 자격증까지 자신이 살아온 기록을 모두 들고 갔다.

    그리고 담당 공무원에게 말했다.

    황병구

    “잘사는 사람은 이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가난한 농군에게는 꼭 필요한 돈입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공무원들이 부족한 서류를 함께 챙겨주고 사업계획서 작성까지 도왔다.

    마침내 그는 30명의 신청자 가운데 최종 3명에 들어 농민후계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또다시 담보가 문제였다.

    수원 농촌진흥청에서 교육받던 중 농림부 장관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황병구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황병구

    “장관님, 저는 재산이 아무것도 없는 농민후계자입니다. 농사를 잘해보라고 후계자로 뽑아놓고 담보가 없어서 돈을 빌릴 수 없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작은 농부 한 사람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제도를 움직였다.

    농협의 신용보증부 대출을 통해 담보가 부족한 농민후계자에게도 길이 열렸고, 황병구는 울산에서 그 혜택을 받은 첫 사례가 됐다.

    그 돈을 종잣돈 삼아 딸기 농사를 키웠다.

    한 해 2천만~3천만 원을 벌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군에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살 수 있겠다.”


    5장. 딸기에서 난으로

    그러나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딸기 농가가 늘면서 가격은 떨어졌다.

    황병구는 또 다른 작물을 찾았다.

    1989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호접난이었다.

    병충해와 자연재해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부가가치도 높았다.

    그는 국내시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본을 바라봤다.

    까다로운 검역을 뚫고 세 포기가 한 화분에 담긴 완제품 난을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농사꾼 황병구의 무대가 한국을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에는 난 농업 분야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됐다.

    국무총리상, 농림부 장관상, 새농민상도 이어졌다.

    가난해서 고등학교를 중퇴했던 산골 소년이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전문 농업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였다.

    난은 계속 자라는데 팔 곳이 없었다.

    그때 황병구는 질문을 바꾸었다.

    “난을 어떻게 더 잘 키울 것인가?”

    가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난 시장은 어디인가?”

    답은 미국이었다.


    6장. 하늘에서 내려다본 올랜도

    황병구는 미국 시장에 관한 자료를 구해 다섯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미국으로 간다.

    문제는 미국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수소문 끝에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난을 재배하던 오연길 회장과 연결됐다.

    2001년 9월.

    황병구는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창밖으로 플로리다의 대지가 펼쳐졌다.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황병구

    “하늘에서 올랜도를 내려다보는데 딱 느낌이 왔어요. 여기다.”

    그러나 느낌만으로 사업을 할 수는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그는 농림부 장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한국 난 농가가 살려면 수출해야 합니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한국 화훼산업의 전진기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편지는 장관에게 전달됐다.

    그리고 정부 지원 3억6천만 원, 5개 화훼농가의 투자금 5억 원, 농협의 4억5천만 원이 모였다.

    총 12억 원 규모의 자금이 마련됐다.

    플로리다 아팝카에 한국 난 산업의 미국 전진기지가 만들어졌다.

    코러스 오키드의 시작이었다.


    7장. “미국 안 가면 이혼하자”

    그러나 사업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었다.

    아내 이차분 여사였다.

    20년 동안 한국에서 삶의 터전을 일궜는데 어느 날 남편이 미국으로 가자고 했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나이에 미국에서 어떻게 살겠느냐며 아내는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자 황병구는 최후통첩을 했다.

    황병구

    “나는 미국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당신이 정말 안 간다면 이혼하고 각자 살자.”

    결국 아내가 따라나섰다.

    울산의 농장을 정리하고 두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 선택 이후 부부는 다시 20년 넘게 같은 농장에서 함께 땀을 흘렸다.

    황병구의 성공을 이야기하면서 이차분이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8장. 100만 달러의 적자

    미국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기회였던 것은 아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터졌다.

    한 해 적자가 100만 달러까지 불어났다.

    은행 빚은 쌓였다.

    사업을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이번에도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은행을 찾아갔다.

    그리고 400만 달러를 더 빌려달라고 설득했다.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장이 돌아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버텼다.

    또 버텼다.

    2011년 마침내 시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1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그 뒤 흑자는 해마다 늘었다.

    그리고 2015년.

    위기의 순간 빌렸던 400만 달러를 모두 갚았다.

    공동 주주들에게도 배당금을 지급하고 회사를 독자 운영 체제로 전환했다.

    그는 성공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었다.
    끝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9장. 10년을 기다린 난 화분

    황병구에게 사업은 자신의 회사만 잘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난을 미국으로 들여올 때 흙을 제거하고 뿌리 상태로 가져와야 하는 규정 때문에 유실률이 높았다.

    한국 화훼업계의 오랜 숙제였다.

    정부 관계자가 바뀌어도 해결되지 않았다.

    황병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 정치권까지 찾아갔다.

    플로리다 상원의원을 접촉하고 양국 관계자들을 움직였다.

    논의가 시작된 지 약 10년.

    마침내 한미 양국의 협정을 통해 화분째 수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 기업인의 사업 문제가 아니라 한국 화훼농업의 수출길을 넓히는 일이었다.

    그에게 농업은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생업을 넘어 산업이 되어 있었다.


    10장. 농사꾼에서 한인 경제인의 대표로

    사업이 안정되자 황병구의 시선은 한인사회로 향했다.

    2013년 민주평통 위원을 시작으로 동포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2017년 중앙플로리다한인상공회의소 창립과 함께 회장을 맡았다.

    2018년 미주한인상공회의소총연합회 부회장과 이사장을 거쳐 2021년 총회장에 올랐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한인 경제인들이 모이는 세계한상대회를 미국에서 치르는 중책까지 맡았다.

    흥미로운 것은 총회장직을 결정하는 과정이었다.

    황병구는 혼자 결정하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 딸, 사위와 며느리까지 불러 가족회의를 열었다.

    사업과 봉사로 인해 가족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의 동의를 얻은 뒤에야 회장직을 받아들였다.

    청송 산골의 가난한 농군 아들이 미주 한인 경제계를 대표하는 자리에 서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농사꾼.


    11장. 어머니의 한마디

    황병구의 인생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소를 팔아 230만 원을 빌려준 울산의 형님.

    담보 없이 500만 원을 빌려준 이웃.

    서류를 함께 만들어준 공무원.

    그의 건의를 들어준 장관.

    미국 진출의 길을 연결해준 사람들.

    그리고 평생 곁을 지킨 아내.

    하지만 그의 삶에 가장 오래 남은 사람은 어머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자신조차 살아남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황병구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 먹고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남을 도와요?”

    어머니의 대답은 짧았다.

    “있을 때 돕는 게 뭐가 대단하노. 없을 때 돕는 게 진짜지.”

    황병구는 그 말을 잊지 못한다.

    평생 가난과 싸웠던 어머니가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돈이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었다.


    12장. 돈을 좇지 않았더니 돈이 따라왔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쉽게 돈 버는 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한국농수산대학교 학생들이 그의 농장에 연수를 올 때마다 황병구는 이야기한다.

    황병구

    “요령부리지 말고 자기가 맡은 일에 프로가 되세요. 돈을 따라다니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돈은 따라옵니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던 청년이었다.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미국에 왔다.

    자본도 없었다.

    그런 그가 평생 붙들었던 자산은 세 가지였다.

    정직.
    신뢰.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것.


    에필로그 — 다음 꽃을 심다

    이제 황병구는 또 다른 꿈을 꾼다.

    마이애미에서 보스턴까지 이어지는 100개의 가든센터.

    단순히 꽃을 파는 매장이 아니다.

    한국의 우수한 화훼와 농자재를 미국시장으로 연결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플랫폼이다.

    그의 구상대로라면 약 1,000명의 청년에게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일흔을 넘긴 농사꾼은 아직도 새로운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다만 이번에 심으려는 것은 난이 아니다.

    사람이고, 기회이고, 다음 세대다.

    청송의 산골 소년은 배가 고파 농사를 시작했다.

    울산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난을 팔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터전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씨앗을 심고 있다.

    한때 검정고무신의 구멍을 새끼줄로 묶어 신었던 소년.

    그 소년이 수십 년 뒤 미국의 거대한 온실 한가운데 서 있다.

    주변에는 그가 키운 수많은 꽃이 피어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것은 호접난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삶.
    도움을 받았기에 도움을 돌려주려 했던 마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더 넓은 세상을 열어주고 싶다는 꿈.

    그것이 황병구가 남기고 싶은 진짜 유산이다.

    LEGACY OF HWANG BYUNG-KOO

    꽃을 키운 사람, 사람을 키운 인생

    “첫째도 정직, 둘째도 정직.
    자기 일에 프로가 되면 돈은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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