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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편 조지 워싱톤 버지니아의 측량기사

    kun kwon Park2026년 10월 14일1시간 전
    제 1 편 조지 워싱톤  버지니아의 측량기사

    사진: 제 1 편 조지 워싱톤 버지니아의 측량기사 관련 이미지

    대통령이 되기까지, 한 청년의 57년 미국의 역사를 움직인 대통령들의 삶을 만나보는 시간입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입니다. 우리는 그를 1달러 지폐 속의 인물로 기억합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미국의 첫 대통령.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위대한…

    대통령이 되기까지, 한 청년의 57년

    미국의 역사를 움직인 대통령들의 삶을 만나보는 시간입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입니다.

    우리는 그를 1달러 지폐 속의 인물로 기억합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미국의 첫 대통령.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위대한 지도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버지니아의 한 시골 소년이 어떻게 새로운 나라의 첫 대통령이 되었는지, 그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732년 2월 22일, 영국 식민지였던 버지니아의 웨스트모얼랜드 카운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조지 워싱턴.

    그의 집안은 토지를 소유한 농장주 가문이었지만, 식민지 사회의 최고 부유층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워싱턴에게는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던 벚나무를 도끼로 베어놓고도 정직하게 잘못을 고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일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워싱턴이 세상을 떠난 뒤 전기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진짜 어린 시절은 훨씬 현실적이고 고단했습니다.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복형들은 영국에서 교육받았지만, 워싱턴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했습니다.

    대신 그는 수학과 측량을 배웠습니다.

    열여섯 살 무렵부터 버지니아의 숲과 계곡을 누비며 토지를 측량하기 시작했고, 열일곱 살에는 정식 측량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측량은 단순히 땅의 넓이를 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숲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때로는 야외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땅의 가치와 식민지 경제의 움직임을 배웠습니다.

    젊은 워싱턴은 측량으로 벌어들인 돈을 토지에 투자했습니다. 훗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토지 소유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약 188센티미터에 이르는 당당한 체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하지만 큰 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야망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토지를 소유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영국 제국 안에서 인정받는 인물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꾼 사건은 스물두 살 때 찾아왔습니다.

    1754년, 북아메리카의 오하이오 지역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가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버지니아 민병대 장교였던 워싱턴은 지금의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에서 프랑스군과 무력 충돌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초기 충돌 가운데 하나였으며, 훗날 유럽과 여러 대륙으로 확대되는 7년 전쟁과도 연결됩니다.

    젊은 장교 워싱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계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한가운데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군인 생활은 승리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1755년, 영국군 브래독 장군이 이끄는 원정군에 참여했을 때였습니다.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원주민 전사들의 공격을 받아 참패했습니다.

    전투 중 워싱턴이 타던 말 두 마리가 총에 맞았고, 그의 외투에는 네 개의 총알 구멍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워싱턴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이 전투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지휘관의 책임을 배웠습니다.

    또한 영국 정규군 장교들이 식민지 출신 장교들을 차별하는 현실도 경험했습니다.

    그는 영국 정규군 장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영국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1759년, 스물일곱 살의 워싱턴은 부유한 미망인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그는 버지니아의 유력한 농장주이자 사회 지도층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마운트버넌 농장을 경영하며 담배와 밀을 재배하고, 농업과 토지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동시에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치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의 경제적 기반에는 노예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던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노동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워싱턴의 삶을 평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평온해 보이던 농장주의 생활은 1775년 다시 뒤바뀌었습니다.

    영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의 갈등이 마침내 전쟁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대륙회의는 독립군을 이끌 총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택했습니다.

    그에게는 군사 경험이 있었고, 남부의 핵심 식민지인 버지니아 출신이라는 정치적 장점도 있었습니다.

    그는 총사령관의 봉급을 받지 않고 실제 지출한 경비만 보전받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가 맡은 군대는 제대로 된 군대라고 부르기 어려웠습니다.

    무기도 부족했고, 식량도 부족했습니다. 군복과 신발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전투에서는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습니다.

    1776년, 뉴욕에서 영국군에 밀려난 독립군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습니다.

    병사들은 추위에 떨었고, 군대는 해체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해 크리스마스 밤, 워싱턴은 대담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얼음이 떠다니는 델라웨어강을 건너 적을 기습하기로 한 것입니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트렌턴에서 헤센군을 공격해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는 단순한 전투의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무너져가던 독립군의 사기를 되살리고, 독립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워싱턴의 가장 큰 능력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패배해도 군대를 보존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였습니다.

    마침내 1781년, 프랑스군과 프랑스 해군의 지원을 받은 연합군은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8년 동안 전쟁을 이끈 워싱턴은 이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계속 쥐고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총사령관직을 내려놓고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선택은 새로운 공화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독립을 이룬 미국은 여전히 불안정했습니다.

    연방정부의 권한은 약했고, 각 주는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앞세웠습니다.

    나라를 하나로 묶을 새로운 헌법이 필요했습니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제정회의가 열렸습니다.

    워싱턴은 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1789년, 새로운 헌법에 따라 미국 최초의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선거인단 투표에 참여한 69명 전원이 워싱턴에게 한 표씩을 던졌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는 1792년 재선에서도 선거인단의 만장일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워싱턴 자신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마냥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을 전쟁과 정치 속에서 보낸 뒤 고향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을 위해 마운트버넌을 떠나면서 그는 일기에 자신의 심정을 남겼습니다.

    마치 형 집행 장소로 끌려가는 죄수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새로운 책임이 무겁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1789년 4월, 쉰일곱 살의 워싱턴은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종소리와 축포가 울려 퍼졌습니다.

    트렌턴에서는 여성들과 소녀들이 꽃으로 장식한 개선문 아래에서 그를 맞이했습니다.

    뉴저지의 엘리자베스타운에서는 배를 타고 뉴욕 항으로 들어갔습니다.

    항구에는 환영하는 배들이 모여들었고, 시민들은 새로운 나라의 첫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환영 속에서도 워싱턴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에게는 참고할 만한 선례가 없었습니다.

    미국에는 이전 대통령이 없었고,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지 정해진 관행도 없었습니다.

    그가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후대 대통령들에게 선례가 될 수 있었습니다.

    1789년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은 뉴욕의 페더럴 홀에서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심각한 병을 앓았습니다.

    허벅지 부근에 생긴 고통스러운 종기성 감염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고, 한동안 정상적인 활동이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야 할 대통령이 취임 초기부터 건강의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워싱턴은 대통령의 책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과 나라를 운영하는 대통령은 전혀 다른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특별한 인생입니다.

    대학에 가지 못했던 버지니아의 측량기사.

    영국군 장교가 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청년.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군대를 지켜낸 총사령관.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공화국의 첫 대통령이 된 인물.

    조지 워싱턴의 삶은 처음부터 완성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망과 실패, 인내와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한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는 완벽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면서도 노예제를 자신의 삶 속에 유지했던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가 미국의 첫 대통령으로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새롭게 탄생한 공화국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당시 미국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요?

    독립은 했지만 돈도 부족했고, 연방정부의 권한도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신용을 세우고, 정부 조직을 만들고, 서로 다른 주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야 했습니다.

    내일은 조지 워싱턴 두 번째 시간.

    '그가 받은 숙제 — 1789년,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실' 편에서 계속됩니다.

    애틀랜타 라디오코리아, 미국 대통령 열전.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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