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암 장영주의

장군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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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원암 장영주 특집 ‘장군의 마음’

Author
king
Date
2022-11-11 10:33
Views
2218

1 “태산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


 

1598년 왜란 초, 조선 수군의 저항 없이 상륙에 성공한 일본군은 부산 일원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겁에 질린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함은 자침하고 수영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경상 좌병사 이각은 자신이 지휘해야 할 울산의 경상 좌병영 군사들을 내버린 후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왜군의 함대는 무인지경으로 경상도해안을 유린하며 서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경상도 해역에 인접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함대는 수시로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다. 장군은 여수 앞 바다에 전 병력과 함선을 집결하고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의 급한 구원 요청을 받았으나 담당 해역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4월 27일, 전라좌수영군은 조정의 허락을 받고서야 경상우수영군과 연합함대를 출동시킬 수 있었다. 

 

치밀한 막바지 준비 후 5월 3일, 중위장을 불러 4일 새벽에 출항할 것을 약속한다. 출전하기 전 달아난 여도 수군 ‘황옥천’을 잡아다 머리를 높이 걸어 군율의 엄정함을 전 진중에 떨친다.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1582년 5월 5일(음) 새벽, 여수를 출발한다. 첫 출전으로 임진왜란 발발 후 약 20여 일이 지난 후이다. 

 

전라좌수영의 1만5천명의 병력 중 후방수비와 행정지원 병력을 제외한 5천여 명이 출전한다. 전함은 주력 전함 판옥선 24척, 중형 협선 15척, 소형 포작선 46척 등 85척으로 구성되었다. 

 

오래전부터 전쟁을 예감한 이순신은 왜란 발발 하루 전 거북선을 바다에 띄울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규모였다.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 판옥선 4척, 협선 2척이 당포에서 합류한다. 평소 준비상태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장면으로 통합함대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한다. 

 

전쟁 내내 용의주도하게 첩보습득을 중시한 한 장군은 날랜 사도 첨사 ‘김 완’과 여도 권관 ‘김인영’을 척후대로 보낸다. 5월 7일 정오경 과연 적 선단을 발견한 척후대는 신기전을 쏘아 올린다. 

 

일본군 함대는 대소 선박 50여척으로 경상도 서쪽해안으로 진출하던 중에 해안에 상륙하여 인근 촌락을 약탈하고 있었다. 실전이 전무한 이순신의 수군은 일본 수군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적의 등장을 드디어 맞닥뜨린 조선 수군들을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이순신은 휘하의 장졸들에게 엄하게 명령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옥포 포구의 적을 향해 대열을 지어 쳐들어간다. 이순신의 지휘 하에 조선 전 수군은 모두 순식간에 일본 전선을 포위하고 강력한 바람과 우레같이(急如風雷) 총통과 활을 퍼부었다. 

 

처음 보는 조선함대의 위용과 천지를 뒤흔드는 포격에 일본군의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전술은 빠른 배로 적선을 따라잡고 월선하여 살육전으로 배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도저히 접근 할 수 없는 거리에서 벼락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화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지휘관과 호위선 몇 대는 해안선을 따라 탈출을 시도하였다. 

 

포위망이 더욱 압축되자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해안에 상륙하여 산 속으로 도주하였다. 첫 전투 ‘옥포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대소 함정 26척을 격침시킨 반면 조선수군은 피해가 전혀 없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포로였던 백성들도 구출한다. ‘옥포해전’의 왜군 지휘관은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로 일본군에서는 자수성가로도 유명한 장군이었다. 명량에서 다시 이순신을 만나 손등에 화살을 맞고 도망갈 정도로 대패한다.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의 시작이 바로 거제도 ‘옥포해전’이다. 끝없는 낭떠러지에서 나라를 구한 ‘옥포해전!’ 그날의 상황은 선조에게 올리는 장계 「옥포파왜병장」에 소상하게 기록 되어 있다. 

 

특히 부하들의 이름과 함께 전공을 선조에게 세세하게 적어 올린다. 

 

-전략-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니 날이 저물기로 밤에 지냈습니다. 그리고 7일 새벽에 일제히 출발하여 적선들이 머물고 있는 천성 가덕을 향하여 가다가 정오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사변을 알리므로 적선이 있는 줄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하되 ‘망령되이 움직이지들 말고 산과 같이 정중하라’고 전령한 뒤 그 포구 앞바다로 열을 지어 들어간 즉, 왜선 30여 척이 옥포 선창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큰 배는 사면에 온갖 무늬를 그린 비단 휘장을 둘러치고, 그 휘장 기에는 긴 대를 꽂았으며, 붉고 흰 작은 깃발을 어지러이 매달았는데 깃발 모양은 여러 가지요, 모두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결에 따라 펄럭이며 바라보기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적의 무리들이 그 포구로 들어가 분탕질을 쳐서 연기가 온 산에 가득 찼는데, 우리 군함들을 돌아보고서는 엎치락뒤치락 하며 어쩔 줄을 모르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노를 바삐 저어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을 타고서 배를 저어 가는데, 6척이 선봉에 서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일심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하니 또 배에 있던 관원과 군사들까지도 역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으로써 기약하는 것이었습니다. -후략- 

 

이순신 함대는 왜적을 추격해 영등포를 거쳐 합포에서 5척, 다음 날 적진포에서 11척을 각각 분멸하고 9일 본영으로 돌아왔다. 장군은 이 전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옥포대첩은 ‘세계 4대 해전’으로 알려진 ‘한산대첩(1592년 7월 8일)’으로 이어진다. 세계 4대 해전은 기원전 480년 그리스 ‘데미스토클레스 제독’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 제독’의 ‘칼레 해전’, 1805년 영국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 동양 유일의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다. 

 

학자들은 세계 5대 해전은 ‘동해 해전’으로 꼽는다. 

 

1905년 5월 27일 동해의 대마도근해에서 벌어진 일본 명치해군의 사령관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가 3배가 많은 무적의 ‘러시아 발틱 함대’를 괴멸시킨 해전이다. 동해 해전의 날은 ‘일본 해군의 기념일’이 되었다. 

 

이 해전으로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일본의 ‘명치 해군’은 세계 최초로 본격 항공모함 ‘호쇼’를 진수시키기도 하였다. 더욱 강성해져서 태평양에서 지구최강의 미군해군과도 맞붙을 정도가 되었다. 

 

‘도고’는 승전 축하연에서 “이순신과 같다.”는 찬사를 듣자 정색으로 부인한다. 구지 비교하자면 자신은 영국의 ‘넬슨’과 비슷한 정도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해군사령관은 ‘이순신 장군’이고, 자신은 ‘이순신 장군의 하사관’ 정도의 자격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자기와 같은 정도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도 전해온다.

 

이순신 장군은 변치 않는 마음-‘일심’으로 마침내 ‘적의 스승’이 되셨다.            

[이 글은 당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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