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암 장영주의

장군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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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암 장영주 특집 ‘장군의 마음’(2)

Author
king
Date
2022-11-28 14:48
Views
462

 

– 임진왜란의 국제적 의미 –

 

이순신 장군은 평생을 변치 않는 한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다. 장군은 생사를 초월한 ’일심’의 결과로 마침내 일본이라는 거대한 ’적의 스승’이 되셨다. 

 

‘전(戰)’과 ‘란(亂)’은 싸움이란 뜻은 같지만 쓰임새는 다르다. ‘우크라이나 전’, ‘세계대전’처럼 외국과의 싸움은 ‘전’이고 ‘란’은 동족간의 다툼으로 치부하여 ‘6.25 동란’,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왜(倭)’나 ‘호(胡)’를 남이 아닌 일가로 치부해왔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의 명칭은 당연히 삼국이 달랐다. 조선은 임진년에 왜가 난을 일으켰으므로 ‘임진왜란’이고 정유년에 재침하니 ‘정유재란’이라고 하였다. ​

 

일본은 천황연호에 맞춰 ‘분로쿠, 게이초의 역’(전쟁)이라 칭한다. 명나라도 당시 신종의 연호에 따라 ‘만력의 역’, 또는 왜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왔다고 ‘항왜원조’라고 하였다. 따라서 6.25전쟁은 당연히 ‘항미원조’라고 한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1,100여만 명, 일본은 2,200여만 명으로 조선의 두 배였고 명(明)은 약 1억 5,000만 명이었다. 

 

임진왜란에 투입된 각국의 병력은 조선 9만7천6백여 명, 명나라 19만1천명, 일본 34만 여 명으로 모두 63만 여명이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일본 수군의 함선 수만 해도 800여 척이었다.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은 스페인의 무적함대 33척에 1만3천명,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 27척에 군인 9천명으로 함선 총 60척, 병사 1만2천명이었다. 

 

1944년 역대 최대의 상륙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 총20만 명이 동원되었다. 임진왜란은 아시아의 동북 끝자락인 조, 명, 일과 주변의 명운을 건 세계대전이었다. 

 

1475년, 신숙주의 병이 깊어지자 성종은 그 집을 찾아가 당부의 말을 청한다. “원컨대 일본과 화평을 잃지 마시옵소서.” 신숙주의 유언이 되었다. 

 

그는 명나라를 13번을 다녀왔고, 각종 외국어에 능했고, 일본통신사로 다녀와서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는 등 국제 외교의 최고봉이었다. 

 

병조판서 ‘율곡’은 왜란발발 10년 전 이미 일본과 여진을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선조는 일본의 정세탐방을 위해 자신이 뽑아 보낸 정사 ‘황윤길’의 경고에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차일피일 소일한다. 

 

문약한 리더십은 곧 비할 수없이 큰 비극이 되어 덮쳐왔다. 결과적으로 당시 조선인구중 약 반이 영문도 모른 채 죽거나 다쳤다. 

 

명에 대해 고착화된 사대와 허례허식은 인조반정의 싹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40년이 못 되 터진 정묘, 병자호란으로 한반도는 또다시 절망의 쑥대밭이 된다. 

 

전쟁 내내 도망만 다닌 선조를 비롯한 지배층은 백성들로부터 극도로 소외된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오직 대국 명나라의 권위에 결사적으로 매달려야만 했다. 

 

명나라에게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감사함을 꿈에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믿었던 명은 망하고, 멸시하던 청에게 복속당하면서도 명에 대한 사대를 견지하였다. 

 

선조는 명군의 참전을 성사시킨 가장 큰 공로는 자신에게 있다고 굳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유성룡, 이순신 등의 관군과 의병들의 고통과 영광을 위무하고 지원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하고 시기하였다. 

 

서얼과 의병 출신은 아무리 큰 공을 세웠어도 단 한 명도 인정하지 않았다. 선조는 한때 가장 신임했던 김덕령 장군의 정강이뼈를 산산조각 내어 죽여 버린다. 

 

이쪽저쪽으로 쫒기는 조선백성들 사이에는 “왜군은 얼레 빗, 명군은 참 빗”이라는 속담이 퍼져 나간다. 개전 초 왜군은 전략적으로 조선 백성들에게 식량을 주는 등 위무하였거니와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살아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오히려 도우러 온 명나라 군사들이 지나가면 마을의 닭, 돼지, 소 등은 물론 처자들이 남아나지 않았기에 생겨난 속담이었다. 명나라 원군들에게 제 때에 군량미를 대줄 수 없었던 조선의 실상도 큰 원인이 되었다.

 

백년에 걸친 내전을 통일한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쓸모가 없어졌음에도 여전한 부하들의 강력한 무력을 소진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사해야 할 영지가 더 필요했고 일본을 넘어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 되고 싶은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조선을 치고 조선에서 군량미와 군사를 조달하여 명을 정복한 뒤 인도까지 정복하고자 했다. 

 

1592년, 히데요시는 조선정벌을 위하여 규슈(九州)에 전쟁 지휘부를 설치하고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군사를 차출했지만 에도를 개척하고 있는 이에야스는 열외 시켰다. 

 

그러나 조선의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육지에서는 의병이 가로 막고 명나라의 지원군이 압수를 넘어 왔다. 성과가 나지 않자 1598년 히데요시는 화병으로 죽는다. 

 

2년 뒤, ‘이에야스’는 비축된 실력으로 건곤일척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잔존 세력을 쓸어버린다.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어 ‘에도막부’를 개설하고 그 자손들이 1868년 ‘명치유신’까지 일본을 통치한다. 결국 ‘히데요시’는 죽을 쑤어서 ‘이에야스’에게 바친 셈이다. 

 

전후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는 정권을 잃고 대는 끊어 졌다. 명나라도 점차 국력이 기울어 동북의 신흥 강자 여진의 ‘누르하치’에게 침략을 당하더니 결국 나라를 잃고 만다. 

 

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어 버렸지만 여하튼 조선은 질기게 살아남았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의 공허한 농문으로부터 실제 도움이 되는 ‘실학’을 태동시켜 간다. 

                     

[이 글은 당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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