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요금도 못 낼 정도였는데 가족에겐 괜찮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18일 인천 한 장례식장 지하 1층 빈소에는 전날 새벽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 A(31)씨의 빈소가 마련됐다.
이날 장례식장 8개 호실 중 유일하게 들어선 A씨 빈소에서는 조문객도, 화환도 찾아볼 수 없는 쓸쓸한 분위기 속에 유족들만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A씨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정이 들어서고 장례 준비가 끝나자 침묵을 지키던 유족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B(54)씨는 딸의 사진을 바라보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흐느꼈다.
B씨는 “우리 큰딸은 자신이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항상 아버지 걱정만 했다”며 “2주 전에 건강은 괜찮으시냐고 묻던 딸의 안부 전화가 마지막 통화가 됐다”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어 “단둘이 일본 여행도 가고 가장 최근에는 강원도도 다녀올 정도로 아비를 챙기던 자식이었다”며 “수도 요금을 못 내는 상황인데도 혼자 견딘 걸 생각하면 너무 힘들다”고 덧붙였다.
B씨와 40년 지기라고 밝힌 박모(53)씨도 비극적인 소식에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박씨는 “전세사기 피해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잘 해결되고 있다고 해 가족들도 걱정하지 않았다”며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조만간 부산으로 내려와 아버지를 모시고 살 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떠나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박씨는 A씨가 어린 시절 국내 해머던지기 고교랭킹 1위에 오를 정도로 유망한 육상 선수였다고 설명했다.
A씨는 과거에 언론 인터뷰에서 ‘하나뿐인 여동생을 제대로 챙기는 게 유일한 희망’이라고 밝힐 정도로 가족을 살뜰히 챙기는 언니이자 가장이었다.
그는 강원도에서 원반던지기 선수로 활약하다가 열악한 가정 형편 탓에 부모와 떨어져 외할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A씨는 부산으로 내려온 이후 해머던지기로 종목을 바꿨고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국내 최연소 육상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돼 여자 해머던지기 종목에서 5위를 기록했다.
이후에는 울산시청 소속으로 2012년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은메달을 거머쥔 것을 비롯해 각종 대회에서 선전했다.
선수와 코치 생활을 이어가던 A씨는 2019년 9월 보증금 7천200만원을 주고 아파트 전세 계약을 맺으며 인천 미추홀구에 정착했다.
인천에 오고 난 이후에는 직장을 다니며 착실히 생활비를 벌었다. 아울러 애견 미용 관련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또 다른 꿈을 키우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2021년 9월 전셋집 재계약을 하면서 임대인의 요구로 보증금을 9천만원으로 올렸다. 이후 그가 살던 아파트는 전세사기 피해로 전체 60세대가량이 통째로 경매에 넘겨졌다.
이 아파트는 2017년 준공돼 전세보증금이 8천만원 이하여야 최우선변제금 2천700만원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A씨는 보증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했다.
A씨는 전날 오전 2시 12분께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집에 남겨진 유서에는 전세사기 피해 등으로 처지를 비관하는 내용이 담겼다.
현관문 앞에 놓인 쓰레기봉투에는 수도 요금 체납을 알리는 노란색 경고문이 버려졌다. 쓰레기 더미에서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남은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와 반려동물 배변 패드, 고인의 이름이 적힌 약봉지 등도 나왔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 관계자는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들도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다”며 “정부 차원의 조속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