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가 무효라는 미 연방법원의 1심 판결이 나오면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경제 정책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 대통령 어젠다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이던 관세 정책이 좌초 위기를 맞으면서 경제 청사진의 구조 자체가 흔들리게 됐다는 것이다.
다만 상급심 판단이 남아 있는 데다, 미국 법원이 금지하지 않은 우회로를 통해 다시 관세 부과에 나설 가능성도 있어 불확실성은 여전하다는 관측도 병존한다.
CNN 방송은 28일 관세가 정부지출 삭감, 감세와 함께 트럼프 정부 경제 정책을 지탱하는 세 개의 축 가운데 하나였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현재는 그중 하나만을 잃어버린 셈이지만, 그 결과 전체 경제정책 구상이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론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부과를 무기 삼아 상대국을 윽박지름으로써 무역 조건을 미국에 유리하게 재조정해 자국 산업에 혜택을 줄 수 있다.
동시에 관세 인상은 부분적으로나마 미국 정부의 수입 증대에 기여함으로써 대규모 감세 정책에 따른 정부의 세수 감소 및 부채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
아울러 정부 구조조정과 지출 삭감을 병행함으로써 재정적자 우려는 낮추면서 민간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규모 관세 정책이 상당 부분 무력화되면서 연쇄적으로 다른 정책의 기대 효과도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재정적자를 키우는 대규모 지출 법안을 보게 되어 실망했다”고 직격하는 등 진영 내부에서도 감세 정책에 의구심이 제기되던 터라 경제정책 추진 동력은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으로 명명된 대규모 감세 법안을 두고 공화당 내 ‘재정 매파’들이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다고 CNN은 내다봤다.
관세 위협을 통한 무역조건 재협상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벌써 여러 차례 대규모 관세를 위협했다가 시장의 혼란이 커지면 철회하는 모습을 보여 ‘타코 트레이드'(TACO·트럼프는 항상 겁먹고 물러난다는 뜻)라는 조롱까지 들었다.
이런 와중에 법원에서 제동까지 걸리면서 상대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힘을 상실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05∼2007년 부시 행정부에서 무역 담당 차관을 지낸 프랭크 라빈은 BBC와 인터뷰에서 “이번 판결은 트럼프에 큰 좌절”이라며 “협상의 지렛대를 잃었다”고 말했다.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 부회장은 AP에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정책이 혼란에 빠졌다”며 “90일간의 상호관세 유예 기간에 열심히 협상하던 상대국들은 이제 법적 판단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양보를 미루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과 관세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는 유럽을 향해서는 벌써 호락호락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주문까지 나온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 경제면 편집자를 지낸 앨런 비티는 이날 FT 기고문에서 이날 법원 판결을 두고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상식적인 판단이지만 국가안보정책은 좀처럼 건드리지 않는 법원의 성향을 고려하면 놀라운 결정”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터무니없을 뿐 아니라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비티는 이어 “구속력 없는 협상을 한 영국을 비판했던 유럽연합(EU)이 법적 근거도 없는 협정에 일방적으로 양보한다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라며 “전 세계는 EU가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적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차별적인 관세 전쟁에 제동이 걸렸다는 점에서 일단 안도하는 기류가 읽힌다.
BBC에 따르면 법원 판결 직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과 나스닥 선물 지수 등이 상승세를 보였고 일본과 한국 증시도 올랐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이날 법원 판결 효력에서 벗어난 철강·알루미늄·자동차·자동차 부품 등 품목별 관세는 여전히 효력이 살아 있다.
싱크탱크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닉 마로 이코노미스트는 자동차나 전자제품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이나 대만 등은 앞으로도 미국의 관세 관련 조사의 “인질”로 남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상호관세 역시 이날 법원에서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대신 다른 법을 통해 부활시킬 가능성이 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골드만삭스의 미국 정치경제 수석 분석가 알렉 필립스는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부과할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부과하는 데 사용한 무역확장법 232조가 다시 활용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는 이 밖에도 무역법 122조나 301조도 트럼프 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는 카드로 거론했다.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클라이트 허프바워 비상임 선임연구원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라며 “큰 서사에 두더지 게임 같은 느낌이 더해졌을 뿐”이라고 촌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