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미국 연극·뮤지컬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을 거머쥐면서 한류 콘텐츠 역사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출발한 ‘어쩌면 해피엔딩’의 이번 수상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한국 콘텐츠의 위력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 차트 1위 석권,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수상,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이어 K-컬처의 저변을 넓힌 쾌거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8일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극본상, 연출상, 작사·작곡상, 무대디자인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했다.
한국 창작 뮤지컬이 토니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앞서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단독 리드 프로듀서를 맡은 ‘위대한 개츠비’와 CJ ENM이 제작에 참여한 ‘물랑루즈’ 등이 토니상을 받은 적은 있지만, 국내에서 개발되고 초연한 작품이 토니상을 받은 것은 최초다.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가 창작한 ‘어쩌면 해피엔딩’은 해외 제작진과 배우진으로 작년 11월부터 1천석 규모의 벨라스코 극장에서 오픈런(open run·폐막일을 정하지 않고 무기한 상연) 형태로 공연하고 있다.
원종원 순천향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종합 예술 형태인 뮤지컬로서 인정받았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라며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고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을 받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은 그만큼 국내 뮤지컬 제작 역량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국내 창작진들은 그간 뮤지컬 본고장으로 꼽히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며 역량을 시험해왔다.
신춘수 대표가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브로드웨이에서 단독 리드 프로듀서를 맡아 지난해 ‘위대한 개츠비’를 제작했고 올해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에도 올렸다. ‘마리 퀴리’는 지난해 한국 창작 뮤지컬 최초로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현지 프로덕션으로 장기 공연했다. 한국 K팝을 소재로 한 뮤지컬 ‘K팝’은 2022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박병성 칼럼니스트는 “‘어쩌면 해피엔딩’은 우리나라 소극장에서 했던 작품이다. (이번 수상은) 한국의 뮤지컬 제작 역량이 적어도 중소극장에서는 상당 부분 발전해왔다는 게 증명된 것”이라며 “해마다 아시아권에 우리 중소극장 작품들이 진출한 것은 오래전 일이고 이제 영미권에서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수상을 계기로 국내 뮤지컬의 해외 진출이 가속할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단순한 진출을 넘어 작품으로서 인정받는 분위기다. ‘팬레터’의 중국 라이선스 공연은 올해 열린 중국 대표 뮤지컬 시상식 ‘중국뮤지컬협회 연례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7개 부문을 석권했다.
최승연 평론가는 “K-콘텐츠가 해외에서 유수한 원천으로 인식되는데, 뮤지컬도 이에 속하게 될 것 같다”며 “한국인들이 활동하는 데 길이 뚫리거나, 적어도 (한국 뮤지컬에 대한) 인식이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뮤지컬의 글로벌화가 한층 원활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원종원 교수도 “한국의 제작 역량이 검증받고 관심받을 때 다양한 실험들이 등장한다면 뮤지컬계에서의 한류도 그리 멀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국 뮤지컬 글로벌화의 시작이란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국내 뮤지컬 시장이 대중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과제도 제기된다. 높은 티켓값 등이 대중적인 저변을 넓히는 데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티켓 판매액을 예매 수로 나눈 티켓 1매당 평균 판매액은 5만9천392원으로 전년(5만6천998원)보다 4.2% 높아졌다.
원종원 교수는 “일반 대중은 티켓 가격이 굉장히 비싸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더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뮤지컬 산업 경쟁력이 좋아질 수 있다”며 “공연장에 사람이 모이면, 그들이 소비하면서 관광하는 집객 효과도 유발할 수 있다. 그런 환경을 모색할 수 있는 (제도적인) 배려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성 칼럼니스트는 “대극장의 창작 뮤지컬들은 아직 (해외에서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대극장 시장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면서 “중소극장에서도 마니아 작품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갖춘 작품 개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뮤지컬 산업을 국내에 국한하지 않고 아시아권인 한·중·일 시장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제안도 나온다. 콘텐츠에 강점이 있는 한국, 공연장과 같은 인프라에 강점이 있는 중국 등 각국 특성을 살려 하나의 큰 시장을 형성하자는 목소리다.
최승연 평론가는 “한·중·일이 하나의 아시아 시장으로 묶여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와) 대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시장을 형성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다”며 “이때 우리가 창작의 주체가 되는 게 중요하다. (콘텐츠의) 원천을 만들어내기 위한 교육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정부가 이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