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넘어간 건물
튀르키예(터키)와 시리아에 규모 7.8과 7.5의 두 차례 강진이 강타한 지 닷새째로 접어들면서 사망자가 두 나라에서 2만3천명을 넘어섰다.
생존자 구조에 결정적인 ’72시간 골든타임’은 이미 지났지만 기적 같은 구조 소식은 계속 이어졌다.
튀르키예 재난관리국(AFAD)은 10일(현지시간)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가 1만9천875명으로 추가 집계됐다고 밝혔다.
튀르키예와 국경을 맞댄 시리아에서는 당국과 반군 측 구조대 ‘하얀 헬멧’이 밝힌 것을 합친 사망자가 3천377명으로 늘어났다.
두 나라를 합친 사망자는 2만3천252명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사망자(1만8천500명) 규모를 훌쩍 뛰어넘었다.
로이터 통신은 이번 튀르키예 강진이 21세기 들어 7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낳은 자연재해로 기록됐다고 전했다.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건물 잔해 속에 갇혀 있어 2003년 3만1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란 대지진 피해 규모를 뛰어넘을 가능성도 있다.
튀르키예의 대표적인 지진 과학자인 오브군 아흐메트는 붕괴한 건물 아래에 갇혀 있는 사람이 2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사망자가 끝없이 나오면서 관련 기관의 사망자 예측 수치도 계속 상향 조정되고 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이날 새 보고서에서 이번 지진 사망자가 10만명을 넘길 확률을 24%로 추정했다. 이틀 전 14%에 비해 10%포인트나 뛰었다. 지진 직후 최초 보고서에서는 10만명 이상 확률이 0%였다. 사망자가 1만∼10만명일 확률도 30%에서 35%로 올려 잡았다.
이와 함께 USGS는 이번 지진에 따른 튀르키예의 경제적 손실 추정 규모도 국내총생산(GDP)의 최대 6%에서 10%로 상향 조정했다.
통상 72시간이라고 여겨지는 생존자 구조에 결정적인 ‘골든타임’이 지나갔지만 구조대는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 시간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튀르키예 남부 항구도시 이스켄데룬에서 지진 발생 후 무너진 건물 아래 깔려 있던 6명이 101시간 만에 구조되면서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다.
역시 최대 피해 지역인 가지안테프에선 이 지역의 무너진 건물 지하실에서 17세인 아드난 무함메드 코르쿳이 구조됐다.
그는 지난 6일 지진 발생 이후 이곳에서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며 94시간을 버텨왔다고 밝혔다.
하타이주 사만다그에서는 지진으로 폐허가 된 건물에서 태어난 지 10일 된 신생아와 함께 이 아기의 엄마가 지진 발생 90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돼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튀르키예에서 최소 9명의 어린이와 몇 명의 성인이 구조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시리아에서도 부족한 인력과 장비 속에서 6살 소년이 잔해에 갇힌 지 닷새 만에 구조돼 비탄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됐다.
구조 장면을 지켜보던 주민들은 무사 흐메이디라는 이름의 이 소년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손뼉을 쳤다.
튀르키예 재난관리국(AFAD)은 이날 기준 구조 인력 12만1천128명과 굴착기, 불도저 등 차량 1만2천244대, 항공기 150대, 선박 22척, 심리치료사 1천606명이 지진 피해 지역에 투입됐다고 밝혔다.
튀르키예 외교부는 전 세계 95개국이 원조에 나섰고, 이미 60개국에서 온 약 7천명의 구조대원들이 현장에서 수색·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무라트 쿠룸 도시화 장관은 튀르키예에서 약 1만2천채의 건물이 붕괴하거나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비록 지진이 강력하긴 했지만 잘 지어진 건물들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다며 건축 내진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탓에 피해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알렉산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비상계획 교수는 “이번 재난은 부실 공사로 인한 것이지 지진 탓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생존 위기를 겪고 있다. 집도 가족도 잃은 이재민들은 거리를 배회하며 추위와 배고픔, 절망과 싸우고 있다.
지진 피해 지역이 워낙 광범위해 신속한 구호가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 탓에 현지에선 살아남은 이들 중 상당수가 2차 피해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지진 대응 담당자인 로버트 홀든은 “많은 생존자가 끔찍하게 악화하는 상황 속에 야외에 머물고 있다”면서 “물과 연료·전력·통신 등 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들의 공급이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최초 재해보다 더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2차 재해가 발생할 실질적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강진 발생 후 구조 작업 지연 등 초동 대처 실패와 ‘지진세’의 불분명한 용처, 부실공사 책임론, 이재민 발생에 따른 후속 조치 미흡 등 정부의 총체적인 부실 대응을 규탄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비난 여론이 우세해짐에 따라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당국의 대응이 신속하지 않았다며 강진 발생 이후 처음으로 정부 잘못을 인정했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도 지진 발생 닷새째인 이날에서야 처음으로 피해 지역을 방문해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이 대치하고 있어 구조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시리아 서북부 지역에는 전날 6대에 이어 이날도 유엔의 구호 물품을 실은 트럭 14대가 바브 알하와 육로를 통해 들어갔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가뜩이나 늦은 지원마저 턱없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튀르키예와 인접한 바브 알하와 육로는 국제사회가 시리아 서북부 반군 점령 지역으로 구호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시리아 서북부 지역에 도움을 주기 위해 더 많은 길을 열어야 한다는 국제 사회의 요구가 이어지자 시리아 정부는 이날 반군과의 최전선을 통한 인도주의적 구호물자의 전달을 승인했다.
다만 시리아 정부는 구호물자 전달이 언제부터 가능한지는 밝히지 않았다.
유엔은 이번 강진으로 시리아에서 최대 53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머물 곳을 잃은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유럽으로 향할 경우 2015년과 같은 시리아발 난민 사태가 또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외신들은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