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만에 산문집 낸 최영미 “90년대 女시인 기생취급 당했다”

최영미(61)는 등단한 지 30년 된 시인이다.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소녀의 감성을 갖고 있다.

그는 5년 전 ‘괴물’이라는 시를 통해 원로 시인 고은의 성추행을 폭로해 문화예술계에 미투를 확산시킨 사람이다.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투사가 아닌 ‘글쟁이’로 평가받고 싶다고 했다. 고은의 성추행 폭로로 자신을 시인이라기보다는 사회운동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30년 전 등단 이후 한국에서 여성작가로 살기가 너무 힘들어 외국으로 떠날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서울대 학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1992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지금까지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 7권의 시집을 냈다.

최근에 내놓은 ‘난 그 여자 불편해’를 비롯해 다수의 산문집도 펴냈다. 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정원’도 출간했다.

그는 미투운동을 확산시킨 공로로 2018년 서울시 성평등 대상을 받기도 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최영미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최영미

—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 6·25전쟁 당시 육군종합학교 단기 코스를 밟아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이 학교는 전투를 이끌 소대장이 부족해서 만든 단기 양성 코스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뒤에 골동품 중개업 등 여러 사업을 바꿔가면서 하셨다. 사업이 잘될 때도 있었고 안될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고교 시절 역도부 주장을 할 만큼 운동을 좋아하셨다. 칠순이 될 때까지 집에서 매일 한 시간씩 과격한 근육운동을 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건강을 중시해서 술·담배를 하지 않으셨다.

— 본인은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나.

▲ 일반적으로 딸이 많은 집을 보면, 아버지가 딸 중 한 명은 아들처럼 키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남성성을 물려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거의 모든 스포츠 중계를 시청했다.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경기도 같이 봤다. 아버지가 TV를 보면서 “저 선수 장점은 발이 빠른 것”이라고 어린 딸에게 설명해주곤 했다.

—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 머리가 좋으셨다. 매사에 빈틈이 없고, 살림도 잘했다. 못하는 게 없으셨다. 6년제 경기여중고를 다니다 6·25전쟁으로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에 진학해서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교직에 몸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분이었다.

2009년 7월 잠실야구장에서 시구한 뒤 관중에게 인사하는 최영미
2009년 7월 잠실야구장에서 시구한 뒤 관중에게 인사하는 최영미

— 어린 시절 운동을 좋아했나.

▲ 나는 운동신경이 아주 좋았다. 지금도 탁자에서 컵이 떨어지면 순발력 있게 잡는다. 어린 시절에 줄넘기는 앞으로, 뒤로 몇백 번씩 했고, 옆으로 하는 줄넘기를 스스로 개발하기도 했다. 공기놀이는 평범하게 하기는 너무 쉬워서 창의적 개발로 난도를 높여서 했다. 고무줄넘기는 우리 동네를 평정했고 옆 동네로 원정을 갈 정도로 잘했다. 다른 동네에 가서 고무줄놀이를 하다 밤늦게 집에 오는 바람에 길을 잃기도 했다.

— 학창 시절 운동선수로 뛰지는 않았나.

▲ 내가 다니던 선일여고는 농구를 잘했다. 선생님이 농구부 할 사람 손 들으라고 했는데, 키가 큰 나는 손을 들까 말까 고민하다 들지 않았다. 집안 분위기상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방과 후 체육관에 가서 농구부원들이 운동하는 것을 며칠간 지켜봤다. 그런데 농구 코치가 부원들한테 욕설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나는 저런 욕을 들어가면서 운동을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 축구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 축구는 다른 경기에 비해 몰입도가 강하다. 손이 아닌 발로 하는 경기이다 보니 객관적 실력이 떨어지는 팀이 우수한 팀을 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스웨덴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다. 호나우지뉴 선수도 좋아한다.

최영미 돌사진
최영미 돌사진

[본인 제공]

— 어린 시절 독서를 좋아했나.

▲ 어린 시절에는 동화책과 역사책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사다 주신 세계 명작동화 전집, 몇십 권짜리 위인전도 재미있게 읽었다. ‘빨간 머리 앤’, ‘작은 아씨들’ 등은 거의 다섯 번씩 읽었다. 동네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집에는 책이 많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초기까지 방과 후에 거의 매일 그 친구 집에 가서 책을 읽었다.

— 청소년기 독서는 어떠했나.

▲ 사직 도서관을 다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인가 새로 생긴 정독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방학 때에는 점심과 저녁 도시락 두 개를 싸서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내가 공부하러 가는 줄 알았다. 컴컴한 밤에 도서관에서 나오면 수위 아저씨가 “학생이 읽을 책이 아직도 더 있어?”라고 물을 정도였다.

— 청소년기에는 주로 무슨 책을 읽었나.

▲ 문학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특히 고전을 많이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교과서에 언급된 책은 모두 읽자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국어와 역사 교과서에 언급된 책은 모두 찾아서 읽으려 노력했다. 톨스토이의 책도 그렇게 읽었다. 등단 이후에는 오히려 독서량이 줄었다.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2021년 시선집 출간 간담회에서 최영미
2021년 시선집 출간 간담회에서 최영미

[연합뉴스 자료사진]

— 대학 시절에는 무슨 책을 읽었나.

▲ 사회과학책을 주로 봤다. 제3세계 종속이론 같은 책이다. 여성해방 이론 책도 읽었다.

— 동아리에 들어가서 읽은 책인가.

▲ 고전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고전을 좋아해서 들어갔는데, 고전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운동 서클이었다. ‘강철서신’을 썼던 82학번 김영환이 고전연구회 후배다. 고전연구회 외에 여학생들만 모이는 서클에도 들어갔다. 여기서 여성해방 이론을 공부했다.

— 동아리 커리큘럼은 어떠했나.

▲ 선배들이 제시하는 커리큘럼에 거부감이 있었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 독서를 하고 온 상황이었고, 세상에 대한 이해가 좀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떠받들었던 책들을 나는 별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나.

▲ 나는 리버럴한 편이다. 학생운동의 핵심이 아니었고 변두리에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학생운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 헷갈릴 정도다. 학창 시절 사회주의에 경도되지 않았다. 물론 팀을 이뤄 자본론도 번역했지만, 비판적 의식이 있었다. 한마디로 사회주의에 잠깐 경도된 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내가 그 이념에 대한 확신을 갖지는 않았다.

중학교 시절이 최영미(왼쪽에서 세번째)
중학교 시절이 최영미(왼쪽에서 세번째)

[본인 제공]

— 어릴 때부터 시를 썼나.

▲ 청계천에 있는 광희초등학교 2학년 때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거기서 금붕어를 소재로 시를 써서 입선했다. ‘금붕어야, 사람들이 널 보고 이쁘다고 하지만 너도 아픔이 있겠지’ 하는 내용으로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입선작이 많았기에 내가 아주 많이 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받은 글짓기상이어서 나한테는 의미가 컸다. 중학교 시절에도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입선한 적은 있었지만, 장원을 한 것은 아니었다.

— 언제부터 시를 좋아했나.

▲ 세검정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가 산꼭대기에 있었다. 등교와 하교를 하는데 빠른 걸음으로도 각각 20분 정도 걸렸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등하교하면서 시를 들려주면 좋아했다. 수업 시간에도 시를 잘 외웠다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받아서 더 열심히 외웠다.

— 어릴 때 언어적 재능을 발견했나.

▲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 직후 5교시 수업 시간에는 아이들이 졸기도 했다. 그때 선생님은 나를 불러내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나는 전에 읽었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설 공주’ 같은 동화책을 이야기해줬다. 동화책 내용이 헷갈리면 각색도 했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니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꾼이었다.

등단한 30세 무렵 수목원에서 최영미
등단한 30세 무렵 수목원에서 최영미

[본인 제공]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 20대 후반에 고시원에서 지낸 일이 있다. 여기저기 입사 원서를 내기도 했지만 떨어졌을 때였다. 그전에는 아예 취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경멸하고 비판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고시원에 간 것은 고시 공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내 인생을 돌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30매 정도 원고를 쓰면 그 이상 나가지 못했다. 시작은 하는데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나의 일기장을 뒤적이다 내가 쓴 시 여러 편을 발견했다. 그때 소설보다는 시로 등단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 등단은 금방 했나.

▲ 1992년 ‘창작과 비평사’를 통해 등단했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습작 기간이 짧았지만 등단한 나이는 서른 살이었으니 늦은 편이었다. 대부분의 시인이 20대 초반에 등단하고 10대에 등단하는 사람도 있다.

2019년 '이미출판사'를 등록한 뒤 최영미
2019년 ‘이미출판사’를 등록한 뒤 최영미

[본인 제공]

— 하루 루틴은 어떻게 되나.

▲ 밤 11시에서 1시 사이에 자고 빠르면 5시 정도에 일어난다. 잠이 깨면 물 한 잔을 먹고, 출판사를 운영한 뒤부터는 책 판매량을 체크한다. 출판사와 서점이 공유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내가 운영하는 ‘이미출판사’의 책이 몇 부 나갔는지, 구매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20대인지, 30대인지 등을 알 수 있다. 구매자의 지역도 나온다. 출판사를 운영하려면 이런 정보를 알아야 홍보를 제대로 할 수 있다.

— 낮에는 강연을 많이 하는가.

▲ 미투 이전과 비교해 강연이 많이 줄었다. 대기업 강의가 많이 감소했다. 고은씨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는 뉴스가 나오기 이전에 잡힌 강의마저 취소하는 기업이 있었다.

— 본인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데, 기업들은 왜 강의를 취소하나.

▲ 그게 한국 사회다. 남자들은 잘 이해를 못 하는데, 여자들은 너무 잘 이해한다. 한국 사회는 내부 고발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한국은 남자들 간의 네트워크가 강하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남자들끼리의 네트워크다. 능력 있는 여성들이 사회에 많이 진출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거의 모두 남성들이 한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최영미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최영미

[촬영 이건희]

— 미투 이후 손해를 많이 봤나.

▲ 미투 이후 ‘센 여자’가 됐다. 나는 누구를 저격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내 글로 평가받고 싶다. 최근에 펴낸 ‘난 그 여자 불편해’라는 산문집에 수록된 60개 꼭지 가운데 미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5꼭지, 간접적인 것까지 포함하면 7꼭지밖에 안 된다. 그런데 기자들이 서평을 쓰면 미투 쪽으로만 간다. 이런 게 진짜 불편하다. 나는 전사가 아닌 글로 평가받고 싶은 사람이다.

— 미투 이후 문단 성폭력이 많이 줄었나.

▲ 내가 문단 모임에 안 나가니 잘 모른다. 그러나 문단 성폭력이 쉽게 근절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문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가부장적 유교문화, 남존여비 문화가 널리 잔존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성추행, 성희롱이 나쁜 행위라는 것은 인지됐지만 성폭력이라는 그 습성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는다.

고은 시인
고은 시인

— 고은씨는 본인한테 사과한 적이 있나.

▲ 고 선생이 나한테 직접적으로 사과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는 많이 갖고 있던 직책들을 내려놨다. 그것은 간접적인 사과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으로 본다. 본인이 당당하고 떳떳하면 직책을 내려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고은의 문학적 능력과 업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문학이 내 취향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내 돈으로 고은의 시집을 사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시를 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고은의 시가 생명력이 있다면 살아남을 것으로 생각한다.

— 고은은 어떻게 문단의 권력이 됐나.

▲ 내가 문단을 떠난 지 오래돼서 문단이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문단의 권력은 은밀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문화예술계의 권력은 눈에 띄지 않는다. 기업체는 직책이 있으니 누가 최고 권력인지를 알 수 있으나 문단은 그게 쉽지 않다. 문학상의 경우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문단에 찍히면 문학상 후보에 오르지도 않고, 원고 청탁도 들어오지 않는다.

2018년 8월 고은 시인으로부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해 법원 변론에 출석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는 최영미
2018년 8월 고은 시인으로부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해 법원 변론에 출석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는 최영미

— 평론가, 문인 등이 고은의 추행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침묵했을까.

▲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일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왜 침묵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 문인단체 중 하나인 한국작가회의는 진보적 성향이 강한가.

▲ 참다운 진보인지는 알 수 없다.

— ‘돼지들에게’라는 시의 모델은 누구인가.

▲ 시의 모델이 된 사람이 불러내서 나갔는데, 아무런 용건이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집에 와서 성경책을 들춰보니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구절이 눈에 확 띄어서 시를 쓴 것이다. 그가 나에게 성희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됐던 것이다.

2018년 7월 미투운동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영미
2018년 7월 미투운동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영미

— 등단 이후 삶은 어떠했나.

▲ 한국에서 여성작가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남성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여기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금방 알아듣는다.

— 문단이 상대적으로 성폭력이 심한 것인가.

▲ 내가 등단할 때는 성희롱, 성추행이 관행이었다. 내가 무슨 행사를 마치고 나오면 뒤에서 누가 엉덩이를 만지기도 했다. 놀라서 뒤돌아보면 그는 그냥 씩 웃는다. 등단 초기에는 문인들과 술자리에서 어울리곤 했는데, 여성 문인을 기생으로 취급했다. 술을 따르라고 하고, 술이 넘치거나 부족하게 따르면 다시 따르라고 했다. 술 따르려고 시인이 됐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국 사회에서 문단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문단의 성폭력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나.

▲ 문인들뿐 아니라 독자들, 언론 종사자들도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제도가 바뀐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는 사람들의 물갈이가 이뤄져야 한다.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최근 최영미 시인이 펴낸 산문집 표지
최근 최영미 시인이 펴낸 산문집 표지

— 최근에 내놓은 산문집 ‘난 그 여자 불편해’는 어떤 취지로 썼나.

▲ 페미니즘 취지로 낸 책이 아니다. 산문을 모은 것이다. 지난 13년간 산문집 두 권을 낼 정도의 글이 모였다. 그동안 나는 시인인데, 산문을 많이 썼다. 신문사, 잡지사 등에서 원고 청탁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쓴 글 중에서 괜찮은 것을 추려서 엮은 것이다.

— 이 산문집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 그냥 심심풀이로 읽으면 좋겠다. 이 책 160쪽의 소제목 ‘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가장 쉽더라’를 책 제목으로 하고 싶었다. 1980년대 후반 재야단체 자원봉사자로 일하다 그만둔 나는 역시 방황 중이던 선배와 자취방이나 카페에서 만나 떠들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 선배가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어려운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그의 답변이 ‘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가장 쉽더라’였다.

— 본인도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 가장 쉬운 경험을 했나.

▲ 이 산문집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미 출판사’ 운영을 시작하면서 각종 계산서를 발행하는 게 제일 어려워 보였다. 내가 인터넷을 잘 못 하기 때문이다. 10년 전부터 출판사를 직접 운영하는 것을 생각해왔지만 엄두를 못 내다가 직접 해보니까 계산서 발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지금 가장 어려운 것은 홍보업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최영미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최영미

— 본인의 성격은 어떠한가.

▲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격이다. 어릴 때부터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언제 행복감을 느끼나.

▲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때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강연이나 모임에서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을 때, 시집이나 산문집을 통해 사람을 기쁘게 해줬을 때 보람을 느낀다.

—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대한민국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몇 차례 떠날 생각을 했고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 내 책 재고가 많은데, 이걸 소진하는 게 현재로서는 중요하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 그동안 나를 먹여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분들, 제 책이 나오면 사는 분들께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삶]시인 최영미 “여성전사 아닌 시인으로 살고 싶다” / 연합뉴스 (Yonha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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