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증거재판주의' 고수…"고유정 범행이라 단정 못해"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가 전 남편 살해·시신 유기 혐의로 기소된 고유정(37)의 무기징역형을 5일 확정하면서 의붓아들 살해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것은 `증거 재판주의'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증거 재판주의는 유죄 판결을 하려면 무죄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격한 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억울한' 범죄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긴 형사소송의 대원칙이다.
형사소송법 307조에는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규정돼있다.
실제로 고씨의 사례를 보면 그가 진범이라고 의심할 만한 여러 정황이 드러났지만, 3개월 이상 지나고 나서야 수사가 진행된 탓에 직접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고씨는 지난해 7월 전 남편 살해·시신 유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데 이어 같은 해 11월 의붓아들을 짓눌러 질식사하게 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당초 의붓아들 질식사 사건은 증거가 없어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는데, 고씨가 전 남편 살해 혐의로 체포되면서 수사가 이뤄졌다. 검찰은 사건 전후 고씨의 행적에 주목해 그를 진범으로 지목했다.
고씨는 사건 발생 전 재혼한 남편 A씨와 다투다가 뜬금없이 문자 메시지로 A씨가 평소 자면서 옆 사람을 심하게 짓누르거나 때리는 버릇이 있다고 언급했다.
검찰은 이를 놓고 고씨가 의붓아들을 살해한 뒤 A씨의 잠버릇 탓으로 돌리기 위해 미리 대화 흔적을 남겨둔 것이라고 봤다.
의붓아들 사망 약 1주일 전 고씨가 치매 노인을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다는 내용의 기사를 검색해서 본 흔적도 검찰은 찾아냈다.
또 고씨는 사건 발생 약 4개월 전에 수면제를 처방받아 갖고 있었는데, A씨가 사건 당시 고씨가 만들어준 차를 마시고 평소와 달리 아침까지 깊은 잠을 잤던 점도 의심스러운 정황으로 제시됐다.
고씨는 사건 당시 감기에 걸려 A씨와 의붓아들을 함께 자도록 하고 자신은 아침까지 잠들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오전 5시와 7시께 휴대전화를 조작한 정황을 확인했다.
하지만 1∼2심은 물론 대법원도 "피해자의 사망 원인과 관련해 합리적 의심이 여지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특히 대법원은 "피해자가 함께 자던 아버지에 의해 눌려 숨졌을 가능성이 있고, 고의에 의한 압박으로 사망했더라도 피고인이 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정황상 범행이 의심되면서도 직접 증거가 없고 다른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 인천에서 발생한 이른바 `낙지 살인'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이 사건에서 김모(당시 32세) 씨는 인천 한 모텔에서 여자친구를 질식시켜 숨지게 한 뒤 '낙지를 먹다 숨졌다'고 속여 사망 보험금을 챙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씨는 여자친구가 숨지기 전 보험계약 변경 신청서를 위조해 자신을 보험수익자로 변경한 점, 보험금을 받은 뒤 유족과 연락을 끊은 점 등이 발각돼 범인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도 사망한 여자친구의 시신이 화장돼 직접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가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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