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억울한 옥살이 36년 만에 무죄…국가배상은 끝내 못 받아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억울함 때문에 죽어서도 구천을 떠돌 것 같아 모질게 생명을 이어왔는데…이제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1972년 춘천 파출소장 딸(당시 9세) 강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15년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정원섭씨가 2008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 직후 춘천지법 법정을 나오면서 한 말이다.
류승룡 배우 주연의 영화 ‘7번방의 선물’ 실제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정씨가 지난 28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정씨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인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신헌법 선포 3주 전인 그해 9월 27일 춘천경찰서 파출소장의 9살 난 딸이 춘천시 우두동 논둑에서 강간 살해된 채 발견됐다.
서슬이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경찰관 자녀가 살해된 이 사건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시한부 검거령까지 내려졌다.
만홧가게 주인인 정씨는 숨진 피해자의 주머니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 점표가 나오자 체포됐다. 시한부 검거령 마감 하루 전의 일이었다.
정씨는 조사과정에서 범죄사실을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듬해인 1973년 3월 1심인 춘천지법에서 강간치상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같은 해 8월과 11월 서울고법과 대법원에 각각 항소와 상고를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됐다.
15년간 복역한 뒤 1987년 모범수로 가석방됐지만, 정씨의 삶과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교도소 복역 중 정씨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사망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아내마저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불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석방 이듬해인 1988년 고향인 춘천을 등지고 전북에 내려가 신학 공부에 매진한 끝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정씨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1999년 11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1년 10월 이마저도 기각됐다. 정씨의 억울함은 영원히 묻히는 듯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결백을 호소한 정씨는 2007년 12월 재심 권고 결정을 끌어냈다.
◇ “고문과 증거 조작”…무죄 확정에도 국가로부터 배상은 끝내 못 받아
정씨는 재심 청구 과정에서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고 유력 증거도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2008년 6월 정씨의 재심이 열린 춘천지법 법정에서 그는 자신을 수사한 경찰관들을 다시 만났다.
36년의 세월이 흘러 서로 칠순을 훌쩍 넘겼지만, 이들의 재회는 묘한 긴장이 흘렀다.
재심 법정의 증인으로 출석한 당시의 한 수사관은 심문을 마치고 방청석으로 돌아가던 중 증인석에 앉아 있던 정씨를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술렁이기도 했다.
법정을 나설 즈음 정씨와 당시 수사관들은 서로 악수를 하며 모질었던 시절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결국 그해 11월 재심을 맡은 춘천지법은 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댄 법원마저 적법 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했다”며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하지 않았던 점에서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정씨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정씨는 정작 국가로부터는 아무런 배상도 받지 못한 채 결국 세상을 떠났다.
2011년 재심 무죄 확정 직후 허위 자백을 강요한 경찰관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총 23억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지만,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다. 소멸시효 기간이 10년이 지난 게 기각 이유였다.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정씨의 별세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표창원 전 국회의원은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사법 피해자 고 정원섭씨가 국가배상을 받을 권리마저 억울하게 빼앗긴 아픔 안고 영면에 드셨다. 공정한 하늘에선 억울함 없이 편안하게 쉬시길 기원합니다”라고 애도했다.
정씨의 발인은 이날 오전 10시30분. 장지는 용인 평온의숲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