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여동생’ 만주 등지서 문서·군자금 전달 역할…
활동 증거 없어 유공자 인정 못받아
생활고 면치 못하다 1954년 부산 영도서 쓸쓸히 눈감아
추모사업회 “여성인데다 중국서 활동, 국내 자료 없는 경우 많아…서훈제도 개선해야”
일제강점기 치열한 독립운동에도 빛을 발하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인 안성녀 여사.
안 의사 가문에서 독립운동을 한 여성은 13명에 이른다. 안성녀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이다.
1910년대 중국 하얼빈에서 남편과 함께 양복점을 차린 그는 군복을 제작, 수선하고 군자금을 몰래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이후 1920년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안 여사는 독립군이 모여있는 북만주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안 여사는 독립군의 주요 문서나 군자금 전달을 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후손에 따르면 안 여사의 거침없는 활동에 일본 군인이나 경찰의 감시는 매우 심했다고 한다.
안 여사의 증손자인 권순일 안성녀오항선추모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안 할머니는 밀림처럼 우거진 산에서 몸에 권총을 지닌 채 딸과 함께 이곳저곳을 피해 다녔다”고 말했다.
이후 광복을 맞이한 안 여사는 한국전쟁과 함께 부산에 피난을 왔지만 이후 삶은 순탄치 못했다.
당장 살 집이 없어 관청에 직접 찾아가 집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후 영도구 봉래동에서 터를 잡은 안 여사는 생활고를 면치 못하다 1954년 끝내 별세했다.
권 사무국장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정부로부터 집이라도 받았지만, 돌아가신 이후 후손들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해 어렵게 살았다”고 말했다.
안 여사가 숨을 거둔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증거 부족으로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 여사의 손자인 권혁우 안성녀오항선추모기념사업회 명예총재는 “주로 중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 남은 자료가 거의 없다”며 “중국에 있는 후손에게도 확인했으나 별다른 증거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시대 특성상 문서로 남은 자료가 없는 점 역시 걸림돌이다.
권 사무국장은 “안 할머니가 일본 경찰로부터 고문을 당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재판에 넘어가야 기록이 남았던 탓에 이를 증명하기 어렵다”며 “구술 증언 역시 친척이 증명했다는 이유로 보훈처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안 할머니처럼 여성이거나 독립유공자 아내의 경우 증거 자료가 없어 서훈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