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가 요구하는 무조건적인 전면 휴전을 사실상 거부하는 러시아가 내달 9일 전승절 80주년을 명분으로 또다시 일시 휴전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크렘린궁은 28일(현지시간) 텔레그램 성명에서 “푸틴 러시아연방군 최고사령관의 결정으로 러시아는 인도주의적 고려를 바탕으로 승전 80주년 기념일 동안 휴전을 선언한다”며 “이 기간 모든 군사 행동이 금지된다”고 밝혔다.
이어 우크라이나를 향해 러시아를 본보기로 삼으라며 휴전 위반 시 ‘적절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승절을 내세워 일시 휴전을 선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승절은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공휴일로 승전국 러시아가 크게 기념하는 날이다.
세계대전을 끝낸 역사적 의미 있는 날을 맞아 러시아가 일시 휴전을 선언한 건 표면적으론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국제 사회에 평화를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만들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휴전 선언 시점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연결 지어보면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종전 협상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과 경고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조치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난 뒤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 “푸틴은 지난 며칠간 민간 지역과 도시, 마을에 미사일을 쏠 이유가 없었다”며 “아마도 그는 전쟁을 중단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은행’, ‘2차 제재’ 등을 거론하며 “그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있다”고 경고했다. 제3자 제재라고도 불리는 2차 제재는 제재 대상과 거래하는 기업이나 개인까지 제재하는 강력한 조처다.
푸틴 대통령은 이달 중순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 중재에서 발을 뺄 수 있다고 경고하자 하루 만인 19일 일방적인 ‘부활절 30시간 휴전’을 선언했다.
이런 식으로 임시 휴전을 선언함으로써 전쟁 중단에 대한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고, 무조건적인 전면 휴전은 아니더라도 대화나 종전 협상에는 의지가 있음을 국제사회에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미국이 압박할 때마다 일시 휴전을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써 미국과 협상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임시방편’으로 대응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부활절 휴전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교전이 그치지 않아 유명무실했던 점을 고려하면 내달 초에도 실질적인 휴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측도 러시아의 전승절 휴전에 대한 진의를 의심한다.
안드리 예르마크 대통령 비서실장은 텔레그램에서 “휴전 없는 러시아의 평화 선언은 모두 거짓말”이라며 “러시아는 전선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현재도 우크라이나를 (이란) 샤헤드 드론으로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안드리 시비하 외무장관도 엑스(X·옛 트위터)에서 “러시아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즉시 휴전을 해야 한다”며 “왜 5월8일까지 기다려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우크라이나는 지속 가능하고 포괄적인 휴전을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 우리는 최소 30일 동안의 휴전을 지속해서 제안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캐롤라인 레빗 미 백악관 대변인도 이날 기자들에게 “그는(트럼프) 양국 지도자들에 대해 점점 더 불만을 느끼고 있다”며 “그는 영구적인 휴전을 원한다. 살인을 멈추고 유혈 사태를 중단하기 위해 먼저 영구적인 휴전을 원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