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7회 아카데미(오스카상) 시상식은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지난해 성취를 축하하는 자리로 조촐하게 열렸다.
이번 시상식은 지난 1월 LA에서 보름 넘게 이어진 대형 산불과 수많은 피해자를 위로하는 뜻을 담아 예년에 비해 차분한 분위기 속에 치러졌다.
진행자와 아카데미 측 인사들은 산불 피해자 등을 위해 기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며 동참을 호소했고, 행사 중간에는 LA 소방관들이 무대에 올라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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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행’ 없었던 시상식…리사 공연 눈길
이날 시상식은 뮤지컬 영화 ‘위키드’ 배우 신시아 에리보의 공연으로 막을 올렸다. 에리보의 열창에 아리아나 그란데가 가세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면서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후 진행자인 코넌 오브라이언이 데미 무어 주연 영화 ‘서브스턴스’의 한 장면을 차용해 무어의 몸을 본뜬 마네킹 안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으로 등장해 객석의 웃음을 자아냈다.
작년에는 시상자로 나온 프로레슬러 겸 배우 존 시나가 주요 부위만 가린 채 나체로 무대에 오르는 파격 행보를 보여 화제 몰이를 했으나, 올해는 그런 기행은 벌어지지 않았다.
시상식 중간에 펼쳐지는 축하 공연도 예년보다 많지 않았는데, 공연자 중 한 명으로 블랙핑크 리사가 무대에 올라 시선을 집중시켰다.

K팝 가수로는 최초로 오스카 시상식에서 축하 공연을 한 리사는 우아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춤과 가창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리사는 뒤이어 무대에 오른 팝스타 도자 캣, 레이와 함께 ‘007’ 시리즈 헌정 공연을 펼쳤다. 이 가운데 리사는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의 주제가인 ‘리브 앤 렛 다이'(Live and Let Die)를 단독으로 불렀다.
공연이 끝난 뒤 세 가수가 함께 서서 인사하자 청중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주최 측은 ‘특별’ 출연자로 영화 ‘듄’ 속의 모래 벌레를 본떠 만든 인형을 등장시켰고, 이 모래 벌레는 무대에 여러 차례 등장해 피아노와 하프 등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관객들을 웃게 했다.

◇ 팔레스타인 다룬 다큐 수상…여우조연상 살다나 “이민자” 강조
이날 수상자들의 수상 소감 중에는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노 아더 랜드'(No Other Land) 제작진의 팔레스타인 평화를 기원하는 발언이 특히 주목받았다.
‘노 아더 랜드’는 팔레스타인의 평화 운동가 바젤 아드라와 이스라엘 저널리스트 유발 아브라함이 협력해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아드라는 이 영화에 대해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견뎌왔지만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가혹한 현실을 반영한다”며 “나는 두 달 전에 아빠가 됐는데, 내 딸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처럼 폭력과 철거, 강제 이주 등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 제작자인 아브라함은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목소리가 함께 모이면 더 강해진다고 생각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로 생애 처음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은 조이 살다나는 감격의 눈물을 보이며 수상 소감으로 “내 할머니는 1961년에 이 나라에 왔고, 나는 이민자인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자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꿈과 존엄성, 근면성을 가진 나는 도미니카 출신 미국인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내가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진행자 ‘뼈있는’ 농담…인종차별 논란 배우 가스콘 등 언급
이날 시상식 진행을 맡은 유명 방송인 오브라이언은 시상식을 시작하며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오브라이언은 이번 시상식을 앞두고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킨 ‘에밀리아 페레즈’의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을 언급하며 “영화 ‘아노라’에는 ‘F-워드'(욕설)가 479번 나오는데, 그것은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의 홍보 담당자가 세운 기록보다 많다”고 말했다.
가스콘의 과거 인종차별적인 글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 기사 등이 쏟아진 것을 두고 가스콘 측이 보였을 반응을 농담 소재로 삼은 것이다.
오브라이언은 이어 “카를라, 당신이 오스카에 대해 트윗할 거라면, 내 이름을 지미 키멀(작년 시상식 진행자)로 해달라”고 덧붙였다.
이때 중계 카메라에 포착된 가스콘은 오브라이언의 농담에 손뼉을 치며 웃어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앞서 가스콘은 2021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윤여정이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고 흑인 배우가 함께 연기상을 수상한 것을 두고 “내가 아프리카-한국 축제나 흑인 인권 시위, 3·8 여성대회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등의 글을 트위터에 올린 것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을 일으켰다.
당초 ‘에밀리아 페레즈’는 이번 시상식의 13개 후보로 최다 지명돼 작품상 등 주요 부문 수상 가능성을 높였으나, 가스콘의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오스카 경쟁에서 밀렸다는 해석이 나왔다.

가스콘은 트랜스젠더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일각에서는 그가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가스콘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해 사과했고 이날 시상식에도 후보 자격으로 참석했다.
오브라이언은 이날 시상식을 여는 독백에서 ‘에밀리아 페레즈’를 비롯해 넷플릭스의 작품이 18개 후보에 올랐다고 언급하면서 “가격 인상과 함께”라고 덧붙여 넷플릭스의 구독료 인상을 꼬집기도 했다.
오브라이언은 또 근래 영화 업계에서 뜨거운 화두인 인공지능(AI)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우리는 이 (시상식)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AI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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