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아닌 전쟁을…미소 지으며 외국 마을 불태울 것”
NYT “러 병사들 마음 보여주는 뒤틀린 청사진”
“재미있었다면 그건 전쟁범죄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동원된 러시아군 병사들이 작년 9월 하르키우 전선에서 패퇴하기 전까지 감시초소로 이용하던 한 마을 주점 뒷방에 남긴 낙서다.
14일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한때 하르키우주 벨리카 코미슈바하 마을에 주둔했던 러시아군 제2 근위 차량화 소총사단 병사들은 전쟁 전까지 500명가량이 살았던 이 마을의 유일한 주점을 낙서투성이로 바꿔놓았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탄압에서 러시아계 주민들을 ‘해방’하자는 선전전 문구와 함께 “승리 아니면 죽음을…우리에겐 세계가 필요하고, 세계 전부라면 더 좋다”는 글도 보였다.
살인으로 인한 정서적 충격을 해소하기 위한 방어기제인 듯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된 우크라이나인들을 ‘비(非)인간화’하려는 모습도 엿보인다.
한 러시아군 병사는 “신이 도와주실 것이고, 우리는 ‘우크롭'(ukrop·허브의 일종인 딜의 러시아어 이름)들이 그를 만나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크롭을 베어라”라고 적었다.
주점 외부에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일으켜라”란 영어 낙서가 그려지기도 했다. NYT는 이 낙서들에 대해 “러시아군의 근간을 이루는 일반 병사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뒤틀린 청사진”이라고 평가했다.
제2 근위 차량화 소총사단은 작년 2월 개전 직후 키이우 점령전에 투입됐던 러시아군 정예 부대다. 이 부대는 키이우와 하르키우에서 잇따라 철수했고, 현재는 크레민나 인근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이른바 대반격에 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인들이 주둔지역이나 점령한 시설물에 낙서를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예컨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 가까이 대(對)게릴라전을 펼쳐야 했던 미군 병사들은 저속한 농담과 간부에 대한 불평불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등이 담긴 다량의 낙서를 남겼다.
이들은 살인의 충격을 완화하려고 ‘제거'(waste), ‘훈연'(smoke), ‘기름칠'(greased) 등 표현을 썼고 ‘무즈’, ‘하지’ 등 용어로 탈레반과 이라크인들을 지칭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벨리카 코미슈바하 마을에 남긴 낙서의 어조는 이보다 확실히 더 어둡고 공격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NYT는 지적했다.
러시아군 병사들의 낙서 중에는 “아이스크림과 보드카가 그립다”거나 열악한 러시아군 전투식량의 맛을 참을 수 없다는 한탄,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총탄을 보급받았다는 불평도 있었다.
실제로 이들이 주둔했던 장소에서 발견된 러시아제 7.62㎜ 소총탄 탄피에는 1988년과 1989년이라고 제조연도가 찍혀 있었다.
한 병사는 “겨울이 다가오는데 철수를 안 한다”고 적었고, “가는 곳마다 도둑질 좀 하지 말라”고 쓴 병사도 있었다.
이 마을 주민 스비틀라나 마주렌코(56)는 주점 주변의 많은 집이 절도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도둑맞은 것이 없는데, 그건 러시아군이 진주하기 전 가한 포격으로 집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NYT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