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빚은 희대의 영국 이중간첩 블레이크 사망

1950년대 서방 첩보원 수백명 밀고해 처형

서방 도청작전 무력화…발각·수감 뒤 탈옥

6·25 발발 후 3년간 북한 인민군 포로생활

“미군의 북한 민가 폭격 보고 공산주의 전향”

'007의 첩보대국' 영국을 수차례 농락한 희대의 이중간첩 조지 블레이크[AP=연합뉴스 자료사진]

‘007의 첩보대국’ 영국을 수차례 농락한 희대의 이중간첩 조지 블레이크[AP=연합뉴스 자료사진]

 

냉전 시대에 서방에 수차례 충격을 안긴 희대의 이중간첩 조지 블레이크가 향년 98세로 사망했다.

한국전쟁을 현장에서 겪고 북한군에 포로로 끌려다니다가 공산주의자로 전향하는 등 한반도의 비극과도 미묘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러시아 해외정보기관인 대외정보국(SVR) 대변인은 러시아 타스 통신을 통해 블레이크가 26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밝혔다.

외신들을 종합하면 블레이크가 수행한 대표적인 공작은 1950년대 동유럽에서 활동하던 서유럽 첩보원 400여 명의 신원을 소련에 넘긴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서방 첩보원 다수가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고 공산주의권을 겨냥한 서방의 정보수집전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블레이크는 동베를린으로 통하는 지하터널에 영국과 미국이 군사용 도청 장치를 설치한다는 기밀을 빼돌리기도 했다.

소련은 그 도청장치를 미국과 영국에 역정보를 흘려보내는 도구로 1년 넘게 활용할 수 있었다.

흑발의 전설적 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위키미디아 제공, DB 및 재사용 금지]

흑발의 전설적 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위키미디아]

 

블레이크는 1961년 결국 소련 간첩이라는 사실이 발각돼 42년형을 선고받고 영국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그는 1966년 동료 죄수와 출소한 수감자의 도움을 받아 교도소 담을 넘어 탈옥했으며 철의 장막을 뚫고 동베를린에 안착해 소련으로 건너갔다.

첩보영화 007로 대변되는 스파이 대국 영국으로서는 블레이크에게 다시 농락당한 사건이었다.

영국은 그를 반역자로 여겼지만, 그는 평생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을 영국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배신을 하려면 먼저 거기(영국)에 속해야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거기에 속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블레이크는 소련에 이어 러시아에서 국가적 영웅 대접을 받으며 평온하게 여생을 보냈다.

그는 그레고리 이바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을 갖고 첩보원을 교육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옛 국가보안위원회(KGB) 중령 출신으로 연금도 받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냉전시대 공로를 높이 평가해 2007년 블레이크에게 훈장을 줬다.

블레이크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지지는 한때 러시아와 영국의 외교갈등을 부추기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날 푸틴 대통령은 “탁월한 전문가이자 빼어난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블레이크를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영국 정부는 그의 사망 소식에 어떤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과거 인터뷰에서 자신이 북한에 세뇌당했다는 주장을 끝까지 부인했다. 그는 미군 비행기가 작은 마을들을 계속 폭격하는 것을 보고 서방에 대한 수치심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승리해 전쟁이 끝나는 것이 인류에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DB 및 재사용 금지]

블레이크는 과거 인터뷰에서 자신이 북한에 세뇌당했다는 주장을 끝까지 부인했다. 그는 미군 비행기가 작은 마을들을 계속 폭격하는 것을 보고 서방에 대한 수치심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승리해 전쟁이 끝나는 것이 인류에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블레이크가 이중간첩 생활을 한 데는 한반도에서 겪은 비극이 많은 영향을 줬다는 관측이 많다.

그는 1948년 주한 영국 대사관의 부영사 직함을 갖고 서울에 와 북한, 중국, 동아시아 쪽 소련의 정보를 수집하고 첩보체계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블레이크는 1950년 발생한 한국전쟁 기간에 다른 외교관들과 함께 북한 인민군에 잡혀 3년간 평양부터 압록강까지 끌려다니며 포로생활을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하고 전쟁에 환멸을 느끼면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블레이크는 러시아, 영국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북한에서 본 한국전쟁의 참화가 소련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2011년 영국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전향을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었느냐는 물음에 미군의 북한 민가 폭격을 들었다.

블레이크는 “거대한 미군 폭격기들이 북한의 조그만 마을들을 인정사정없이 공습했다”며 “젊은 남자들은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여자, 어린이, 노인들이 마을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방비로 보이는 사람들을 겨냥하는 아주 강하고 기술적으로 우월한 국가들에 내가 소속돼 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며 “내가 잘못된 편에 섰고, 공산주의 체계가 승리해 전쟁이 끝나면 인류에 더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조지 블레이크[AFP=연합뉴스 자료사진]

조지 블레이크[AFP=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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