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인프라·예보체계 미비·기후위기 영향 가속화 영향
댐 붕괴 경고 무시됐나…성난 민심에 ‘긴급조사’ 요구
열대성 폭풍으로 댐이 무너지면서 물에 잠긴 리비아 동북부 항구도시 데르나의 사망자 수가 최대 2만명에 이를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는 가운데, 유독 리비아에서 피해가 컸던 이유에 대한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애초 이번 사태는 지난 10일(현지시간) 열대성 폭풍 ‘다니엘’이 쏟아낸 비에서 시작됐지만, 주변국과 달리 리비아에선 댐 두 곳이 붕괴하면서 높이 7m에 이르는 거센 물살이 도시를 쓸어내렸다.
리비아 전 보건부 장관 레이다 엘 오클리는 14일 CNN에 “건물 6층 높이와 맞먹는, 혹은 그보다 높은 거대한 파도가 쓰나미처럼 나라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고 말했다.
지중해에는 허리케인, 태풍과 비슷한 형태의 ‘메디케인'(medicane)이 일 년에 두세차례 지난다. 메디케인 다니엘은 이미 그리스, 튀르키예, 불가리아를 지나며 엄청난 비를 뿌렸다. 이들 국가에서도 20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왔다.
다니엘은 이례적으로 수온이 높았던 지중해를 지나며 세를 불렸다. 따듯한 바닷물에 태풍을 더 강력하게 만들었고, 데르나에 이르기 전 서쪽 도시 알-바이다에서의 일일 강우량은 이미 414㎜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데르나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홍수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1942년부터 2011년까지 최소 5차례 홍수를 겪었다.
무너진 댐 2곳은 1973∼1977년 건설돼 50년 이상 된 곳으로, 한 곳은 75m 높이에 저장용량 1천800㎥에 이르고, 다른 한 곳은 45m 높이에 150만 ㎥의 용수를 담을 수 있다.
데르나 부시장 아메드 마드라우드는 알자지라 방송에 이들 댐이 2002년 이후 유지 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비아 세바대학은 이미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댐 붕괴 위험이 크다며 범람을 피하려면 주기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국 리딩대학의 리즈 스티븐 교수는 CNN에 댐 설계 표준과 극한기후에 대한 위험성이 적절히 고려됐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댐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했다.
예보 시스템이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페테리 탈라스 세계기상기구(WMO) 사무총장은 이날 유엔 제네바 사무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리비아 홍수와 관련 “국가 단위의 경보를 발령할 수 있는 기상 당국이 제 기능을 했다면 홍수로 인한 인명피해 대부분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짚었다.
탈라스 사무총장은 “전에 기상예보 시스템 개선 작업을 돕기 위해 리비아 당국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현하지는 못했다”며 “국가 안보 상황이 불안한 점이 요인”이라고 말했다.
리비아는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여파로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동부를 장악한 리비아 국민군(LNA)과 서부 트리폴리 통합정부(GNU)가 대립하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가족과 친구를 잃은 데르나 주민의 슬픔은 자국 정부를 향한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정계는 정부에 이번 홍수에 대해 긴급 조사를 요청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리비아 정치인들은 법무장관에게 이번 홍수에 대해 긴급 조사에 착수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번 요청은 동부와 서부를 장악한 정부 양측에서 개별적으로 나왔다.
동부의 모하메드 멘피 리비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의장은 댐 붕괴를 초래한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조사를 원한다고 말했다.
리비아는 동서 정부로 양분됐지만 법무장관의 영향력은 전국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주민들은 그동안 댐 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 피해 당일 지방 정부가 통행금지를 발령한 점 등을 문제 삼고 있다.
무너진 댐은 2007년 한 터키 업체가 보수 계약을 맺었지만 2011년 내전 발발 후 현장을 떠났다. 이후 정부는 새 보수 업체를 찾지 못했다.
또 다니엘이 닥친 밤 LNA 보안 관계자들이 TV에 출연, 시민들에게 대피하지 말고 집 안에 머물라고 지시했는데 이를 은폐하려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