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사도광산 갱도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연초배급명부'(이하 연초명부) 3종 등 일련의 자료에서는 조선인이 가혹한 노역 현장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한 대상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강제노동에 관한 한국의 지적을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결국 조선인에 대한 가해 행위를 빼놓고 전체의 역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일민족문제연구’에 실린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의 논문 ‘조선인 연초배급명부로 본 미쓰비시(三菱)광업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동원'(이하 논문)에서는 사도광산이 조선인의 의사에 반하는 노동 현장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연초 명부는 사도광산 사측이 광부들에게 필수품 중 하나인 담배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문서인데 여기에 조선인의 동향이 일부 기재됐다.
1945년 6월 20일 자 연초명부를 보면 같은 숙소에 머물던 11명 가운데 7명이 탈출했고 3명이 검거됐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노동자가 일터에 나오지 않는 것을 결근, 사직, 퇴사 등으로 분류해야겠지만 사도광산 측은 ‘도주'(逃走)라고 표현했다.
사측도 조선인 노무자는 애초에 그만둘 자유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연초명부의 부속 문서에는 조선에 잠시 다녀올 수 있는 ‘일시귀선(一時歸鮮) 증명서’를 받고 돌아간 이들 가운데 27명이 기한 내에 복귀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집안 사정으로 료(寮·기숙사) 복귀가 늦어졌다”고 적혀 있으나 이 가운데 15명은 마지막까지 사도광산으로 돌아오지 않고 탈출에 성공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이 작성한 공문서인 ‘특고월보'(特高月報)에는 조선인의 더 적극적인 저항이 기록됐다.
예를 들면 1940년 2월 17일 ‘신보료'(新保寮)라고 불리는 임시 숙소에 머물던 조선인 최재만 등 40명이 불온한 행동을 했으나 당일 ‘해결’했다고 돼 있다.
같은 해 4월 11일에는 97명이 파업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경찰의 개입으로 4월 13일 종결됐고 주모자로 지목된 조선인 3명이 조선으로 송환됐다.
이밖에 “1942.4.29. 미쓰비시 사도광업소 소속 조선인 노무자 3명이 경관에 연행되자 동료 160명이 사무소로 난입해 항의하다가 8명이 체포”됐다는 기록도 있다.
특고월보 자체가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여기 담긴 사도광산의 조선인 동향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만큼 논문 출간을 계기로 관련 연구에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 대표연구위원은 일련의 기록이 조선인이 원하지 않는 환경에서 강제로 일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강제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조선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가서 자의적으로 (사도광산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왜 폭동을 일으키거나 탈출했겠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 조선인 계속 부리려 한 일제…광복 후 귀국 지연
일제는 광복 후에도 사도광산의 조선인을 즉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실제로 연초명부에는 1945년 10월 2일까지 조선인에게 담배를 배급한 기록이 등장한다.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중 한 명인 이선규(창씨명 國本善圭·1923년생)의 경우 1945년 11월 고국을 향해 출발했으나 사고로 복귀가 무기한 연기됐고 같은 해 12월 25일 다시 출발했으나 도중에 ‘사정’으로 인해 사도광산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는 다음 해 6월 말에 비로소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논문은 귀국이 늦어진 사례가 이선규 외에도 꽤 있으며 이는 “일본 패전 이후에도 광산과 당국이 조선인을 귀국시킬 의지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도광산 채광과장이던 히라이 에이이치(平井榮一)는 미출간 상태로 보관된 원고인 ‘사도광산사’에 이런 정황을 보여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착암(鑿岩·바위에 구멍을 뚫음) 작업과 같이 상당한 숙련자가 있었는데, (조선인이) 일제히 귀국함에 따라 갱내 작업은 큰 타격을 입고 출광(出鑛·캐낸 광석을 갱 밖으로 꺼냄)은 급속히 감소했으므로 선광(選鑛·캐낸 광석을 골라내는 일)작업도 불충분해져서 노무배치의 균형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생산을 저해해 극도의 경영난에 빠졌다”고 썼다.
조선인이 위험하고 힘든 갱내 작업에 많이 종사했는데 이들이 귀국하면서 광산업 자체가 어려움을 겪었다는 취지의 설명이다.
◇ 형무소 수감 조선인 다시 사도광산으로…다중동원 사례도
연초명부에서는 형무소에 수감된 조선인도 9명 파악된다.
일제가 광복 후 이들을 석방한 다음 사도광산으로 돌려보냈다는 점이 특이하다.
9명 가운데 8명이 사도광산의 숙소로 돌아온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사도광업소 측이 여전히 소속 광부를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사도광산에 노무 동원된 조선인이 군인 동원으로 전환해 입영하는 이른바 ‘다중동원’ 사례도 연초명부에 기재돼 있다.
1943년 8월 4일 자 니가타(新潟)일보 기사에 의하면 징병제 적용에 따라 입영 자격을 얻은 조선인은 20여 명이었다. 다음 해 9월 6일 자 신문에는 사도광산 조선인 광부 중 8명이 입대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논문은 이번에 분석대상이 된 연초명부가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 홀로 동원된 조선인 일부를 대상으로 한 자료이며 가족과 함께 온 광부의 기록을 비롯해 연초명부가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추천과 관련해 “강제노동이라는 한국 측의 독자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나가오카 게이코 문부과학상)는 논리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는 일본이 사도광산의 추천 대상 기간을 에도(江戶) 시대(1603∼1867년)까지로 한정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 주장이다.
인권 침해의 역사를 감춘 등재 시도에 대해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중시하는 유네스코가 어떤 판단을 할지가 주목된다.